본문 바로가기
수필 100편 감상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by 언덕에서 2010. 9. 30.

 

 

 

 

 

창녀촌의 노랑머리

 

                                                                       1984년 8월 8일 대전에서

 

                                                                                   신영복(1941 ~  )

 

 

 

 

징역을 오래 살다보면 출소한지 얼마 안 되어 또 들어오는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또 들어와 볼낯없어하는 친구를 만나도 나는 그를 나무라거나 속으로라도 경멸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만기가 되어 출소하는 친구와 악수를 나눌 때도“이젠 범죄하지 말고 참되게 살아라”는, 교도소에서 가장 흔한 인사말 한 마디도 저는 지금껏 입에 올린 적이 업습니다. 그것은 그가 부딪쳐야 했고 또 부딪쳐야 할 혹독한 처지를 감히 상상하기 조차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까닭은‘도둑질해서라도 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의‘생각’은 일단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데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 세계를 이질화(異質化)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전의 잘 알려진 원동(元洞)의 창녀촌에는‘노랑머리’라는 여자가 있는데, 한 달에 서너 번씩은 약을 복용하고는 도루코 면도날이나 깔창(유리창)으로 제 가슴을 그어 피칠갑으로 골목의 건달들에게 대어든다고 합니다. 온몸을 내어던지는 이 처절한 저항으로 해서 그 여자는 기둥서방이란 이름의 건달들의 착취로부터 자신을 지킨 유일한 여자라고 합니다.

 이 여자의 열악한 삶을 그대로 둔 채 어느 성직자가 이 여자의 사상을 다른 정숙한 어떤 것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숙한 부덕(婦德)이 이 여자의 삶을 지켜 주거나 개선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무참히 파괴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똥치골목, 역전앞, 꼬방동네, 시장골목, 큰집 등등 열악한 삶의 존재 조건에서 키워 온 삶의 철학을 부도덕한 것으로 경멸하거나 중산층의 윤리 의식으로 바꾸려는 여하한 시도도 그 본질은 폭력이고 위선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고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경우 이를 도둑이라 부르고 있거니와, 훌륭한 사상을 말하되 그에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이를 무어라 이름해야 하는지…….

 모든 문제의 접근이 일단 진실의 규명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의 상응관계(相應關係)를 묻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 삶과 사상이 차질을 빚고 있을 때 제 3자가 할 수 있는 일의 상한(上限)은 제3자가 갖는 시각(視角)의 이점을 살려 그 차질을 지적해 줌으로써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어떤 출발점에 서게 하는 일이 고작이라 생각됩니다.

 삶과 사상의 어느 쪽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라는 방법상의 문제는 전혀 그 사람의 처지에 따라 그 사람의 할 나름이겠지만 삶을 내용으로 하고 사상을 형식으로 하는 상호 작용의 법칙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삶의 조건에 먼저 시각을 돌려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악하되 삶과 상응된 사상을 문제 삼기보다는, 먼저 실천과 삶의 안받침이 없는 고매한(?) 사상을 문제 삼아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어제가 입추입니다. 폭서의 한가운데 끼인 입추가 거짓 같기도 하고 불쌍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추는 분명 폭염의 머지않은 종말을 예고하는 선지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만 모든 선지자가 그러하듯 먼저 왔음으로 해서 불쌍히 보이고 믿기지 않을 따름입니다.

 


 

신영복 : 작가, 대학교수이며 진보적 경제학자이다.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6년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8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더불어 숲, 2003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처음처럼(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청구회 추억(돌베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