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 철학서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

by 언덕에서 2010. 6. 7.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

 

미국 다큐먼터리 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1934~2007)가 쓴 역사저술서로 2008년 9월에 출간되었다. 원제명은 'The Coldest Winter'이다.

 2007년 4월,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자동차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언론은 일제히 미국이 "가장 훌륭하고 명석한 사람"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쓴 이 책은 오늘날까지 우리 현대사의 블랙홀로 남아 있는 한국전쟁의 진실을 조명한 가장 탁월한 보고서이다. 

 이 책은 미국 최고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이며 뉴저널리즘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마지막 유작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사력과 저널리즘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어두운 구석이었던 한국전쟁을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압록강 근방에서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하고 그 결과 더글러스 맥아더와 연합군이 급작스럽게 패퇴했던 재난과도 같은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해리 트루먼, 딘 애치슨, 김일성, 마오쩌둥, 더글러스 맥아더, 에드워드 알몬드, 매튜 리지웨이 등 전쟁의 주역들에 대한 놀랄 만큼 생생하고 미묘한 서술이 이 책의 압권이다.

 이 책의 핵심부에는 최전선에서 공포를 이겨내고 용감히 적에 맞선 병사들의 개인사가 있다. 그들은 어이없게도 권력자들의 위험한 실수와 힘겨운 역사의 어젠다를 오직 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한국전쟁 참전 병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눈을 통해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투들을 목도하게 된다.

 

 

 핼버스탬은 그의 마지막 저술이 된 『콜디스트 윈터』를 자신의 최고 저서이자 미국 전후 외교정책에 대한 45년 저술 인생의 정점으로 꼽았다. 『콜디스트 윈터』는 가장 문학적이고 빛나는 형태의 현대사이며, 베트남전과 근래 사건들의 핵심까지도 조망하고 있는 거작이다. 그는 30년도 더 전에 처음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고, 집필에만 거의 10년이라는 세월을 소요했다고 한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전후 과정을 상술한 여타 책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내용은 일종의 궤도를 그리듯 전개된다. 독특하게도 저자는 1950년 10월 20일 미군 제1기병사단의 평양 입성과 그 이후 10월 25일 벌어졌던 중공군과의 첫 교전 그리고 연이은 운산에서의 패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핼버스탬은 결정적인 판단 착오가 일어났던 한국전쟁 전의 한반도는 물론, 인민군의 공격이 정점을 이루던 1950년 8월의 낙동강방어선전투,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화려한 영광을 안겨준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 혹독했던 겨울 날씨 속에 치러진 1950년 11월의 처참했던 장진호 전투, 그리고 다시 미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 신호탄이 되었던 1951년 2월의 지평리 전투에 집중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소요했고 수백 명의 참전 용사들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했다. 핼버스탬에게 인터뷰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과였을 것이다. 사실 그의 모든 저서는 인터뷰 자료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의 책을 펼치면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핵심을 파고들어 사건과 인물의 고리를 찾아내는 방대한 조사와 치밀한 추적일 것이다.


맥아더라는 오만한 인물

 

 

 

 저자에 따르면 더글러스 맥아더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이었으며 지독한 고집과 잘못된 상황 인식으로 똘똘 뭉친 독선적인 지휘관이었다. 저자는 그중에서 맥아더가 내렸던 가장 위험한 결정이자 오판은 미 8군의 지휘권을 둘로 나눈 것이라고 평가한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위험하고 험준하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지형을 가진 한반도 북쪽으로 부대를 밀어 넣었다. 사실상 그는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각 부대의 약점이 더욱 부각되는 상황을 만들어냈고 그로 인해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사람의 비열한 인간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맥아더는 상부에서 임명한 제8군 지휘관의 역할과 독립성을 줄이고 자기만 통제할 수 있는 독불장군식의 독립된 시스템을 만들었다. 병력을 둘로 나누자 실제로 맥아더의 통제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맥아더는 사실 자신의 독립적인 지휘 시스템을 만드는 것과 권위강화 외에는 전장의 정보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2월 말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격을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에도 맥아더는 중공군 총지휘관이 '펑더화이'가 아니라 '린뱌오'라고 착각했으며, 중공군이 국공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막강한 군대라는 것도 대단치 않게 여겼다. 1949년 9월 마오쩌둥이 집권하기 한 달 전쯤에 맥아더는 의회에서 보낸 대표단에게 중국 공산당 군대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맥아더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부대원들은 모두 맥아더의 과신이 큰 재앙을 낳았다고 인정했다. 육군 참모총장 조 콜린스의 증언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맥아더 본부는 중공군의 특성에 대해 도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와 반대로 마오쩌둥의 판단에 따르면 맥아더의 성격은 중공군에게는 엄청난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 중인 중공군 제40군   - 長津湖 戰鬪에서 - >

 

         ◑     

 

 마오쩌둥은 맥아더가 "오만하고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아주 흡족해했다고 한다. 오만한 적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엇보다도 맥아더의 오만함을 뒷받침해주던 참모들이었다. 그들은 맥아더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저지르고 말았으며 그의 예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요소들은 최소화했다. 무선 통신 기자였던 클라크 리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맥아더를 따라다니며 취재했던 전쟁 사진가 리처드 헨셀에 따르면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맥아더의 성격 중에서 최악의 요소들만 자극하여 극대화시킨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원인 제공은 맥아더에게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공산주의자들과 미국인들의 오판

 

1. 애치슨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 7개 사단이 3주 안에 남한 땅 전체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말에 따르면 "모든 전쟁은 어떤 식이든 일종의 계산 착오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양측 군대가 내린 모든 결정이 하나같이 잘못된 계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우선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에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발언을 했고, 모스크바에서는 이를 한반도에서 어떠한 무력 도발이 있더라도 미국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중요 외교정책 결정자로서 자신의 연설 내용이 공산 진영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감안하지 않은 크나큰 실수였다. 한편 미국은 전쟁에 발을 디디면서 인민군의 저력을 무척 과소평가했다. 미군은 중공군의 경고 신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적군을 추격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더글러스 맥아더의 부대는 압록강 근처에서 아무런 지원 없이 처절하게 싸우다 패배하고 말았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자기 부대원들의 정치적 대의명분과 혁명 정신이 미군의 우수한 무기를 능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소련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2. 김일성과 박헌영

 

<김일성과 박헌영... 박헌영은 1955년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사형당한다>.

 

 

 

 김일성도 계산 착오를 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중국 변두리에서 소규모 빨치산 부대를 지휘했던 경험이 전부였던 촌뜨기 전략가는 미국이 남한을 방어하려고 군대를 보낼 리 없다고 잘못 판단했다. 또 혁명가로서 본인과 남한에서 월북한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인기만으로도 인민군이 남한에 입성하면 남한 농민들이 봉기할 거라고 착각했다.

 한국전쟁시 한국군을 지휘한 예비역 대장 백선엽은 최근 중앙일보의 연재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김일성은 6·25 전쟁을 낙관하고 있었다. 단기간에 대구와 부산까지 치고 내려간다면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근거는 박헌영이 제공했다. 전쟁 전 월북해 북한 수뇌부에 올랐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이 터지면 남한 내의 군 조직과 사회에서 광범위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예견했던 것은 국군과 노동계를 비롯한 남한 사회에 깊이 심어 놓은 남로당 조직의 봉기였다. 북한군을 맞아들이고, 남한 각 사회 부문에서는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는 그런 봉기였다. 그런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 초반에는 그들의 꿈이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에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몽상에 불과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남한 내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조짐조차 찾기 힘들었다. 국군은 장비와 인원, 그리고 무기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남침에 처절하게 맞섰다. 그들이 바라 마지않았던 노동계의 봉기도 없었고, 일반 사회의 소요도 없었다.' (중앙일보 2010년 5/7 자)

 

3. 마오쩌둥과 스탈린

 

 

 

 

 마오쩌둥 역시 한반도 북쪽에서 거둔 승리의 기세를 몰아 다시 남쪽 끝까지 밀고 내려왔다가 큰코를 다치고 말았다. 한동안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은 스탈린뿐인 것 같았지만 냉혹하고 계산에 밝았던 스탈린 조차 몇 차례 계산 착오를 했다. 우선 애초에 미국이 이번 전쟁에 개입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처음에는 소련과 가까운 지역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것이 달갑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소련의 입장도 조금 복잡해졌다. 중국은 전쟁 초반에 몇 차례 심각한 고비를 맞았는데도 소련이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앙금을 풀지 않았고, 그 결과 몇 년 후에 벌어진 중소분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

 

 인민군이 공격을 했을 당시 1950년 6월 25일 밤 브리핑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주 여유로웠다. 초기 보고 당시 그는 북한의 남침이 확정적인 사실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전투기를 요청했다면서 남한군이 이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기 진작 차원에서 몇 대 보낼 예정이라고 거만하고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의 즉각적인 철수를 지시했지만 맥아더는 성급한 결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밝혔다. 실제 상황과 맥아더 사령부의 상황 인식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남한 상황에 무관심한 맥아더의 태도는 사실 한국전쟁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애당초 한국은 정치 과정이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미국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미군 지휘관 존 하지 장군은 한국인들이 일본 식민지 지배자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리고 일제 치하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일본 경찰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정도였다. 1945년에 시작된 한국과 미국, 정확하게 말하면 남한과 미국의 동맹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둘은 다분히 군사적인 관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리 편안한 관계는 아니었다. 남한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참했던 식민지 시대가 종결되자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인지도 모르는 새로운 강대국의 패권에 의해 분단된 현실이 불만스러웠다. 하나였던 한반도가 둘로 나뉜 것만으로도 통탄할 일인데 조국의 운명을 또다시 다른 나라의 결정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결국 긴장과 오해로 가득 찬 관계가 시작된 셈이었다. 양국 관계의 상호 가치와 이해를 강화시키는 것은 냉전 체제뿐이었다. 그러므로 핼버스탬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막아야 할 세계 공산화의 위협이 없었다면 미국이 한국에 신경 쓰는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냉철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맥아더를 상왕(上王 )으로 두었던 트루만,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 한반도를 좌우하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미국인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미국 내 정치상황의 해석과 그러한 정치적 판단이 한국전쟁에 끼친 영향과 결과를 퍼즐처럼 맞추어 읽는 것은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힘든 시기를 보내며 실패를 거듭할 때 맥아더는 이미 국가적인 영웅이었다. 처음부터 트루먼은 자신의 손아귀 밖에서 노는 지휘관이 못마땅했고, 그가 맥아더의 해임을 자주 고려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에게는 막강한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해임하는 데 따르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나 컸다. 한국전쟁 초기에 존 포스터 덜레스가 트루먼에게 지휘관 교체를 건의한 바 있지만 트루먼은 맥아더가 미국에서 너무 오랫동안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왔기 때문에 손을 쓸 여지가 없다면서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든 미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지 않고는 그를 해임시킬 수가 없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이는 군 통수권자가 싫어할 뿐 아니라 신뢰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이유로 해임시키지도 못하는 장군이 멀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놀라운 고백이었다. 둘의 입장 차이는 1950년 10월 중순에 있었던 웨이크 섬 회담에서는 그리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이는 한반도에 또 다른 비극적 요소로 작용했다.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할 확률이 어느 정도입니까?"라고 물었는데 맥아더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트루먼 대통령이나 측근들 중 누구도 맥아더의 발언에 대한 세부 사항을 따져보려 하지 않았다. 만약 중국이 정말 전쟁에 개입하여 공군 부대의 포위망을 피해가기라도 한다면 그다음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간선거가 임박한 상황이라 다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서 비롯한 영광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지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맥아더의 유일한 행운 - 인천 상륙작전

 

<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가 22일 인천 중구 자유공원의 맥아더장군 동상을 참배한뒤 공원을 떠나고 있다. 2009. 4. 22 >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마지막 성공작이었다. 해군 작전참모들과 합동참모들의 반대가 심했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대범하고 독창적인 데다 예상 밖의 행동을 서슴지 않고 일반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거부하는 맥아더의 장점에 행운이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맥아더의 일대기를 집필한 제프리 페렛은 이렇게 썼다. "맥아더의 인생에서 군인으로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날은 1950년 9월 15일 하루였다. 위대한 사령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큰 업적을 이루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그때 총지휘관으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당대 다른 지휘관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오른다. 맥아더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이 바로 그런 기회였다." 「타임」지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프랭크 기브니의 말을 빌리자면 "인천은 지금까지 미국이 맛본 승리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완전히 신격화되었고 뒤이은 끔찍한 패배마저도 다 이해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에 딘 애치슨은 맥아더를 '인천의 마법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맥아더의 정적들과 한국전쟁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단순히 군사적 반대 세력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경계해야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맥아더를 경계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야말로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비밀이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미국 시민들을 포함한 모두가 더 큰 승리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으로서는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미 아시아 문제에 너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을 받는 와중에 인민군을 추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또 한 번 큰 정치적인 반발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결국 1950년 9월 27일에 마침내 북으로 진격하여 38선을 넘으라는 공식 명령이 떨어졌다.

 

<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탱크 앞에 도열한 채 전선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1950년 10월 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듬해 5월까지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다. 51년 봄의 중공군 춘계 공세는 전력이 비교적 약한 국군을 노렸다. [중앙포토]>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미군이 20세기에 범한 최대의 실수는 맥아더가 군대를 압록강까지 몰아붙인 거였다. 둘로 나뉜 그의 부대는 종종 위험할 정도로 연락망이 허술해지는데도 갈수록 열악해지는 날씨를 견디며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그동안 중공군은 높은 언덕 지대를 점령하여 미군이 후퇴하거나 달아날 수 있는 좁은 길을 모두 봉쇄할 준비를 마치고 미군이 올라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혹독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겨울 날씨를 견디며 전투를 벌이는 일이 없도록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며 인천이 공동 상륙 작전의 적임지라고 말했던 그가 이번에는 한반도를 넘어 겨울이 이미 시작된 만주 지역까지 군대를 보낸 것이다. 그 즉시 11월 2일~4일 함경남도 수동에서 제10군단 예하 해병부대가 거센 공격을 받아 44명이 전사하고 162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공군은 마치 미끼를 매달아 유인하는 것처럼 미군을 압박해 북쪽으로 더 깊이 들어오게 만드는 치밀하게 계산된 공격을 펼쳤다. 수동전투는 운산의 전황이 매우 심각하며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연계된 유인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이때가 북진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나 중국과의 확전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딘 애치슨은 훗날 "우리는 맥아더가 악몽을 실행하는 동안 마치 마비된 토끼처럼 그냥 앉아 있었다."라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에게 과연 무엇이었나

 

 전쟁사가 새뮤얼 마셜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금세기에 일어난 소규모 전쟁 중 가장 혹독한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반도의 산악 지형은 미군과 유엔군이 장갑차량 같은 우수한 전투 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든 반면 적에게는 진지와 은신처를 마련해주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딘 애치슨은 "세계 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저주받은 전쟁을 치르기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악의 장소를 물색해보라고 했다면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미국 일각에서는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제2보병사단 23연대 대대장이었던 조지 러셀 중령은 한국전쟁에서 최악의 상황은 "한국 그 자체"였다고 기록했다. 군수 산업과 군사 장비, 특히 전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미군에게 한국 지형은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러셀 중령이 표현한 것처럼 미군의 눈에 비친 한국은 "모든 산이 다른 산들과 이어져 있었다."

 

< 종종 보이는 오역이 눈에 거슬렸다>

 

 베트남전과 달리 한국전쟁은 미국이 텔레비전 뉴스의 출현과 함께 매스미디어 사회로 발전하기 전에 발발했다. 한국전쟁 당시 텔레비전 뉴스는 저녁마다 15분 정도 방영되었는데 방송 시간이 짧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에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당시 기술로는 한국에서 촬영한 전쟁 현장이 며칠이 지나서야 뉴욕의 뉴스 편집실에 도착했기에 국민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도 못했다. 미국 국민들은 주로 신문에 난 흑백 기사를 통해 전쟁 소식을 접했고, 이 때문에 그들의 의식 속에 한국전쟁은 오래된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용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블랙홀 같은 존재였다. 미군들은 자신들의 희생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뿐더러 미국 국민들이 자신들이 참전했던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일상 대화에서 한국전쟁에 관해 예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 >

 

 필자는 우리에게는 현재 진행형이고 미국인에게는 과거형인 이 전쟁을 많은 사람과의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통해서 다시 현재로 불러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한국전쟁의 참상을 충분히 들었다(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하시어 부상으로 전역하셨다).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전쟁의 기록보다 세밀하고 입체적으로 쓰여진 이 책을 통해 미국에서 보는 한국전쟁을 재구성해 볼 수 있었다. 당시의 국제 역학, 미국 내부의 정치 상황, 일반 병사에서 총 사령관, 정치 지도자까지. 그렇지만 본문만 1,0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불과 이틀만에 독파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충분한 재미도 있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 궁금한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끝으로 옥의 티를 꼽자면, 종종 보이는 오역이 눈에 거슬렸다. 역자들이 군 관계 용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되는데, 한국전쟁이 전공인 사람들이야 우리 나라에 얼마든지 있을 테니 출판 전에 감수를 받았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