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Vietnam)의 국부(國父) 호치민(胡志明)
우연히 베트남(Vietnam)을 방문하게 되었다.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호치민에 대한 생각은 종교나 성자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인으로부터 호치민에 대한 설명을 대충 듣긴 했지만 체계적이지 못한 느낌이어서 귀국 후에 호치민의 생애에 대하여 좀 알아보았다. 대학생시절에 '호지명 공산혁명사((胡志明 共産革命史)' 라는 당시 기준에서는 대단한 불온서적이었던 복사본 금서를 읽었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세월이 하도 오래 지나서...ㅎㅎ
그의 아버지는 농민출신으로 평범한 지식인이였다. 그의 아버지가 훼에서 관직에 올랐지만 그해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오래가지 못해 면직되었다(1929년 사망). 프랑스로 부터 식민지배를 받는 국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응웬 닷 탕의 생활은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가혹함을 느끼던 그는 프랑스란 국가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프랑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판단한 그는 1911년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船)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1914~1919년까지는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하인, 견습공 등 그야말로 비참한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그러한 생활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와 민족주의적 가치관은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은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계적인(Global) 시야를 갖게되고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제 1차 대전이 끝나면서 파리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응우옌 아이 꾸옥[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파리는 세계 식민지국가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중심지였다. 1919년 6월 베르사유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이로 인해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때는 레닌이 이미 러시아의 공산화에 성공한 이후여서 유럽대륙은 사회주의의 큰 물결에 휩싸이던 격동의 시기였다. 1920년 프랑스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고,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함께 그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르 파리아》를 편집·발행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한 그는 동방부(東方部) 상임위원이 되었고, 코민테른에서 약 2년간 머물면서 공산당 혁명사상을 익혔다.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자질을 배운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었으며 조국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이때 그는 리 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중국에 근거지를 두고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파견하였다. 《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그는 조직을 점점 강화해 나갔다.
(호치민 광장. 하노이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근처에 호치민 기념관과 박물관, 생가가 있는 베트남의 상징 같은 곳이다. 사진의 건물은 호치민 기념관인데 시신이 방부처리되어 안치되어 있고 참배객과 관람객이 늘 붐빈다. 참고로 국가지도자의 시신이 방부처리되어 보존된 경우는 구소련의 레닌, 중국의 마오쩌뚱, 북한의 김일성, 베트남의 호치민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네나라는 시신을 안치한 건물 앞에 커다란 광장을 끼고 있으니...)
1931년 6월 6일 홍콩의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3년 석방되어 일단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0년부터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41년 2월 베트남에 잠입하였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는 프랑스와 아시아로 지배영역을 넓혀가는 일본이 협약을 맺어 공동으로 식민지배를 하고 있었다. 호치민은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월맹(또는 베트맹 :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하여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 총봉기(總蜂起)를 목표로 세력을 키웠다. 그는 이때부터 응웬 아이 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호치민이라는 이름은 베트남인들에게 대단히 위대하고 동시에 친근한 느낌이어서 지금도 대다수의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호치민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다.
2차대전이 중반에 이르면서 일본의 패배를 직감한 그는 중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1942년 중국 중경을 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장개석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국민당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난을 극복하고 1943년 9월에 석방되었고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는 역량을 보였다. 미국은 낙하산 부대 까지 투입하여 월맹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호치민은 이런 상황을 유효적절하게 잘 이용하였고 미국의 지원으로 민족해방혁명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역사적인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된다.
(호치민 생가. 민족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주석으로 재임중일때도 대단히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호치민을 의장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되어 총봉기하였다. 하노이, 훼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났으며 월맹은 호치민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에 힘입어 베트남 중부와 북부 지역을 빠르고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는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하여 1954년 프랑스를 상대로 디엔비엔푸의 전쟁을 승리하여 독립을 지켰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구소련과 접경한 대국인 중국의 간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이자 정신적 지주이다. 평일 아침 이른 시간부터 호치민 광장은 시신에 참배하는 인파들이 줄을 잇는다)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분단국가가 되고 만 것이다. 베트남은 극도의 정치불안에 휩쌓이게 되었고 곧이어 남과 북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베트남 전쟁을 치루고 종국에는 승리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등과도 전쟁을 치렀다. 그 이후 1980년대가 되어서야 개방 정책을 펼쳐 서방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호치민은 자신이 국가와 결혼했기 때문에 여성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신념하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국가지도자로서의 생활은 극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는데,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주석(대통령) 재임 중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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