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金衍洙. 1970∼ )의 장편소설로 2005년 겨울부터 2007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되었다.
작가는 역사적 기록들의 틈새에 처박힌 개인의 진실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내면을 밝히고 있다. 작중화자 ‘나‘가 화양리를 걸어가다 들어간 한 서점에서 들춰본 어느 책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이 장편소설은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파편들이 교차하며 인간 존재의 외로움과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91년 여름, '5월 투쟁'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대학생 '나'가 학생 예비 대표 자격으로 베를린에 건너가면서 시작된다. 베를린에 도착한 후, 한국에서 학생운동 지도부가 붕괴하며 '나'는 잊힌 존재가 되고, 삶의 허무와 우연성에 맞서기 위해 노트를 사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 노트에는 '나'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들은 사연들,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91년 여름, 대학생 ‘나’는 학생운동 국제 교류 차 독일 베를린에 ‘학생 예비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다. 정식 대표로 활동하게 될 거라 믿었지만, 한국에서 학생운동 지도부가 와해되며 그는 이국의 땅에서 잊힌 존재가 된다. 고립된 ‘나’는 기억과 고독을 견디기 위해 한 권의 노트를 펼쳐 이야기 쓰기를 시작한다.
베를린에서 ‘나’는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을 접한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피아니스트 헬무트 베르크, 일용직 노동자 출신으로 ‘광주의 랭보’라 불린 문화운동가 강시우,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배신과 폭력으로 삶이 무너진 정민의 삼촌 등, 이들은 모두 역사적·사회적 폭력에 삶이 뒤틀린 존재들이다. ‘나’는 이들의 파편적 기억을 이어 붙이며 삶과 정체성, 기억의 연속성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자신이 쓰는 이야기에 회의를 느낀다. 이 기록들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의미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밀려온다. 반복되는 폭력과 상실의 이야기는 그를 더욱 절망에 빠뜨린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깨닫는다. 이 이야기들이야말로 말해지지 않으면 사라지는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며, 글을 쓰는 일이 저항이자 생존임을. 그는 더 이상 운동가가 아닌, 이야기하는 자로서 존재 의미를 찾는다. 베를린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만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고독과 타인의 상처를 잇는 유일한 길이 ‘이야기’라는 믿음 속에서 글쓰기를 이어간다. 이는 기억의 연대를 통한 조용한 저항이며, 동시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주인공 ‘나’는 1990년대 초 학생운동을 경험한 대학생으로, 베를린에 학생대표로 파견되었지만 운동권 해체 이후 버려진 존재가 된다. 내성적이며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인물로, 현실과 단절된 채 허무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그는 자기 존재를 ‘말’과 ‘이야기’로 증명하려는 작가의 분신이자, 기억과 이야기의 중개자다.
'헬무트 베르크'는 유대인 피아니스트로 아우슈비츠 생존자다. 죽은 동료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내면에 죄책감과 정체성의 고통을 안고 있다. 그는 과거를 침묵과 음악으로 감당하며, 화자에게 ‘이야기’의 또 다른 방식인 침묵의 의미를 암시한다. '강시우'는 ‘광주의 랭보’로 불린 문화운동가로, 독학으로 시를 쓴 인물이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나 자기 자신에겐 냉혹하다. 그는 언어를 통한 저항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화자에게 문학의 윤리적 긴장을 일깨운다. '정민의 삼촌'은 사적 폭력으로 삶이 파괴된 익명의 피해자다. 그는 기억되지 않는 고통의 상징이며, 화자에게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을 기록할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수지'는 전직 간호사로, 화자에게 인간적 유대를 제공하는 따뜻한 인물이다. 그녀는 공감을 통해 기억과 이야기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로, 화자가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게 돕는다.
이처럼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자의 상처와 침묵을 안고 있으며, 이를 이야기로 전환하려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잊힌 존재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독자에게 묻는다.
♣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우연한 폭력에 의해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예를 들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후 죽은 동료의 이름으로 개명한 피아니스트 헬무트 베르크, 떠돌이 일용직 노동자에서 '광주의 랭보'로 불리며 혁명적 문화운동가가 된 강시우, 모범적인 고등학생에서 폭행을 경험하고 자살에 이른 정민의 삼촌 등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큰 이야기로 모인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파편들이 교차하며 인간 존재의 외로움과 소통의 가능성을 서술한다. 작가는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통해, 이야기를 통한 치유와 공감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렇듯 이 작품은 1991년 독일 베를린에 홀로 남겨진 한 한국 청년이 타인의 삶을 기록하며 자신과 세계를 이해해 가는 이야기다. 역사적 폭력과 개인의 고통, 말해지지 않은 기억들을 주제로, 이야기를 쓰는 행위 자체가 치유이자 저항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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