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高朋滿座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흥미진진한 과학 여행기 『비글호 항해기』

by 언덕에서 2013. 1. 15.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흥미진진한 과학 여행기 『비글호 항해기』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흥미진진한 과학 여행기 『비글호 항해기』는 찰스 다윈이 쓴 많은 논문과 책 가운데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2년 예정으로 떠난 비글호 탐사 여정은 거의 5년이 걸렸다. 영국으로 돌아온 다윈의 손에는 그동안 보고 느낀 것을 꼼꼼하게 적은 18권의 공책이 들려 있었고 이것에 근거해 1839년에 펴낸 책이 바로 『비글호 항해기』이다.

 이 책은 생물학 외에도 지질학, 화산과 지진의 상관관계와 같이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과 인접한 분야는 물론이고 의학과 기상현상, 심지어는 항공공학적 이론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 항해기를 인류학적인 보고서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말해『비글호 항해기』는 다윈의 대표작『종의 기원』의 탄생과 진화론을 이끌어낸 결정적인 작품이다.

 

 

 

 

 

 비글호의 본래 임무는 생물학, 지질학적 탐사가 아니라 해군 지도의 정확한 도표를 작성하기 위하여 남아메리카 남쪽을 흐르는 조류를 조사하는 것이어서, 지표의 위치와 해안에서 가까운 바다의 수심과 해류의 흐름방향, 세기 등이 정확하고 세심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비글호의 탐사 목적은 지워버린 지 오래고 우연히 탑승기회를 얻게 된 찰스 다윈이라는 이름에 의해서만 기억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여행기로 평가받는 『비글호 항해기』는 그가 쓴 많은 논문과 책 가운데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출판된 지 17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애독되고 있는 이유는, 다윈이 오랫동안 비글호를 타고 다니면서 모은 생생한 항해 여행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흰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 다윈이나, 유인원 몸에 다윈 얼굴을 합성해 그린 풍자 일러스트로 그를 떠올리지만, 『비글호 항해기』에서는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 다윈을 만날 수 있다. 가슴 뛰는 열정과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을 가득 안고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살아 있는 다윈. 작은 것에 쉽게 감동받고, 자신의 열정과 끈기로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노예제도 등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항해기라는 제목에 비해 그 이상의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것은 다윈이라는 인물의 관심사가 얼마나 방대한 것이었는가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윈은 각 지역을 탐사하면서 그 지역의 풍습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방대한 책에는 생물학 외에도 지질학, 화산과 지진의 상관관계와 같이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과 인접한 분야는 물론이고 의학과 기상현상, 그리고 심지어는 항공공학적 이론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이 항해기를 인류학적인 보고서로 만들었다. 각 부분에 대한 서술 역시 단편적으로 마무리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깊은 지식을 토대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자신의 지식이 닿지 못한 곳에서는 후세 과학자들이 밝혀줄 것이라는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이는 다윈이라는 사람의 지식축적이라는 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가시복이 상어를 죽인 이야기, 물새의 비린내를 없애는 방법, 거미와 벌의 목숨을 건 싸움, 개미의 먹이사냥, 소리를 내는 물고기와 나비, 바닷물의 색깔이 변한 이야기, 콘도르독수리의 비행모양과 잡는 방법 등 다윈이 듣고 본 이야기들이 『비글호 항해기』에서 끝없이 펼쳐진다.  5년이란 기간 동안 항해를 통해 채집하고 관찰한 기록을 토대로 다윈은 이 항해를 마친 지 20년이 지난 후에 하나의 가설인 진화론을 발표하게 된다. 그 20년이란 과정은 이 항해에 대한 반추의 기간이었다.

 

 

 

 

 

 다윈은 1831~1836년 해군 측량선 비글호에 동승하여 남태평양의 지질과 동식물을 자세히 조사하여, 생물 진화의 확신을 얻고 귀국, 동(同)시대의 생물학 및 영국 농업에서의 품종개량의 성과를 개괄하여 생물진화론과 자연도태설을 확립했다.

 대단히 신중한 태도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중, 1858년 왈라스(A.R. Wallace, 1823~1913)로부터 거의 같은 의견의 논문을 받고, 주위의 권유에 따라 같은 해 왈라스의 논문과 함께 자신의 학설을 발표. 다음해 『종의 기원』을 계획보다 축소하여 발표했다. 계속해서 많은 저서를 통해 자신의 학설을 제창하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종교계를 필두로 한 각계(各界)의 격렬한 비난공세에 대해 그 자신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헉슬리 등이 대변론전(代辯論戰)을 벌였다.

 

 

 

 

 

 그의 세계관은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었지만, 진화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여 적극적인 발언은 삼갔다.  자신의 학설의 사회적 영향을 극도로 우려하고 있었던 반면, 자유방임주의 시대에 산출된 그의 학설에는 맬더스의 『인구의 원리』의 영향이 보이며 '생존경쟁' '선택' 등의 개념에는 당시의 경제이론이 반영되어 있다.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진보사관을 지탱하는 역할을 짊어지게 되고, 또한 유물론적인 접근법은 맑스와 엥겔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회과학에서는 찬양받았지만, 일부 기독교 신자들로부터는 오늘날에도 혐오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