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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가 100인 작품

동양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 조선 후기의 화가, 강세황(1712 ~ 1791)의 그림

by 언덕에서 2013. 4. 26.

 

 

 

동양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 조선 후기 화가, 강세황(1712 ~ 1791)의 그림

 

 

노인관수 : 단풍잎이 드문드문 달려 있는 나무가 계절의 무상함을, 홀로 앉은 노인이 쓸쓸함을 드러낸다. ‘밀려난 자들의 그림’ 남종문인화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표암 강세황의 ‘노인관수(老人觀水: 노인이 물을 바라보다)’. 바위 틈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노인이 표암 자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사진 간송미술관]

 

 

 

 

니금산수(泥金山水)

 

 

 

 

 

송도기행첩 청청담(松都紀行帖 淸淸潭)

 

 

 

 

 

 

벽오 청서도

 

 

 

 

 

영통동구(靈通洞口)

 

 

 

 

 

백석담(白石潭)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강세황이 71세 때 직접 그린 자화상

 

 

 

 

 

 

강세황, ‘태종대’, [송도기행첩] 제11면, 1757년 추정, 종이에 엷은 색, 32.8×54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박연폭포’, [송도기행첩] 제12면

 

 

 

 

대흥사

 

 

 

 

 

결성범주도

 

 

 

 

 

송도 기행첩

 

 

 

 

 

 

 

 

강세황. 조기 후기의 문인. 화가. 평론가.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 헌정(憲靖).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 임금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던 강세황은 특히 서양 문물과 그림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그래서 동양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다. '송도기행첩'은 물론 그곳에 실린 '영통동구도'는 동서양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대표작인 영통동구의 명물인 큰 바위의 초상에는 산 중턱에 바위가 흩어져 있다. 서로 포개진 채, 모양도 제각각이다. 둥글거나 모나고 크거나 작다. 골짜기 사이로 난 오솔길에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와 시동이 있다. '영통동구도'는 구성이 단순하다. 하지만 호락호락한 그림은 아니다. 바위는 입체적인데, 산수는 평면적이다. 이 '이종교배'가 심상치 않다. 이유가 있다. 명암법과 원근법 같은 태서법(서양화법)을 도입한 탓이다. 동양화에 없던 입체감이 생긴다. 이처럼 강세황은 새로운 미술 조류를 겁내지 않고 자기화했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이 45세 되던 해(1757년) 7월에 개성을 여행한 뒤 보고 들은 견문을 담은 화첩이다. 당시 그는 평생 고생시킨 아내와 사별한 뒤였다. 슬픔을 달래고자 송도로 떠났고, 그곳에서 보고 느낀 소감을 16점의 그림으로 남긴다. 이들 그림은 진경산수화를 기반으로 원근투시법과 서양화풍의 채색기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이 화첩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영통동구도'다. 송도 북쪽, 영통동 계곡의 명물인 거대한 바위에 포커스를 맞췄다.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보고 받은 감동을 그림과 화제로 표현한 것이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