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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요즈음의 처용은 누구일까?

by 언덕에서 2011. 12. 16.

 

 



요즈음의 처용은 누구일까?

 

 

울산에 사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개업 인사장... 그런데 상호가 (주)처용XX이다. 통일신라 때의 기인으로 알려진 처용은 많은 역사학, 고고학, 국문학, 민속학, 종교학자들에 의하여 다양한 해석을 받아왔다. 처용이 추었다는 춤을 조선시대에 재구성한 '처용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작고한 시인 김춘수는 '처용단장'이라는 이미지 강한 장시를 연작으로 발표해서 그 신비스러움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한 번 알아보자. 처용에 관한 문헌은 삼국유사에서부터 비롯된다.

 

 

<처용무>

 

 삼국유사는 신라 헌강왕 시절의 인물인 처용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동해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로 묘사된 것을 봐서 처용은 지방 호족의 자제였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처용의 아내는 대단한 미인으로 보인다.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병 귀신조차 밤마다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를 취하였다고 한다. 내용은 향가로 전하고 스스로 국보라 칭했던 무애 양주동은 완벽하게 번역했다.

 하루는 처용이 밤늦게까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처용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신라향가 처용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역병 귀신이 깜짝 놀라 처용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가 당신 아내를 탐내어 지금 상관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은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기까지 하오. 이제부터는 맹세코 당신의 얼굴 그림만 봐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이런 까닭에 나쁜 귀신을 쫓아 낼 때는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과연 사실이며 역사적으로 지니는 의미는 무엇이고 기실 그는 누구일까?  

 역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처용가의 내용 중에 경주인 서라벌을 ‘동경’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 이 노래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서라벌을 동경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이후이므로, 아마 처용가도 처용 설화를 기반으로 고려 때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 역병 귀신이 처용의 아내와 잔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은 역병 귀신이 아니라 처용으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신분이 대단히 높은 사람일 것이다. 처용은 동해왕이라 불리는 지방 호족의 자제(또는 대단한 권력을 가진 무속인의 자제)라고 가정할 때 그 역병 귀신의 실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처용 이야기의 앞뒤에는 헌강왕이 등장한다. 추측컨대 당시 헌강왕은 지금의 울산 지역인 개운포 부근을 순행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처용의 근거지였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는 대단한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당시 신라왕은 어느 누구의 부인이든 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왕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용의 아내를 취했을 것이다. 이는 처용이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라고 하는 한탄조의 시구로 노래를 끝내는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처용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존재가 그의 아내를 취했던 것이고 그 상대는 역병 귀신이 아니라 바로 헌강왕이었을 것이다.

 

 

<악학궤범의 처용그림>


 처용의 가면은 지금도 처용무에서 사용되고 있고 조선조 성종 때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그림으로 나온다.  처용이 치장한 모습에 관해서는 '고려 처용가'에 자세하게 표현된다. "어와 아비 즈스여"로 시작되는 '고려 처용가'가 묘사하고 있는 처용의 모습은 이렇다. 


 "... 머리 가득 꽃을 꽂아 기우신 머리에, 아아, 목숨 길고 멀어 넓으신 이마에, 산의 기상 비슷 무성하신 눈썹에, 애인 상견 하시어 온전하신 눈에, 바람이 찬 뜰에 들어 우그러지신 귀에, 복사꽃같이 붉은 모양에, 오향 맡으시어 우묵하신 코에, 아아, 천금을 머금으시어 넓으신 입에, 백옥 유리같이 흰 이에, 사람들이 기리고 복이 성하시어 내미신 턱에, 칠보를 못 이기어 숙어진 어깨에, 길경에 겨워서 늘어진 소매에, 슬기 모이어 유덕하신 가슴에, 복과 지가 모두 넉넉하시어 부르신 배에, 태평을 함께 즐겨 기나긴 다리에, 계면조 맞추어 춤추며 돌아 넓은 발에..."

 

 

<괘릉 무인상>


 따라서 '고려 처용가'의 자세한 묘사가 『악학궤범』에 나오는 그림의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용이 등장했던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 헌강왕대임에 비추어, '고려 처용가'는 고려시대의 노래이고, 『악학궤범』은 조선조의 문헌이다. 9세기 말의 신라 헌강왕대에서 『악학궤범』이 간행된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에는 약 600년이라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어 처용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 내려왔다고 믿기에는 좀 그렇다. 조상들의 상상력이 많이 발휘된 듯하다.

 

 

 


 이렇게 처용의 모습을 더듬던 중에 갑자기 떠오른 하나의 상(像), 얼굴 모습이 있었다. 경주 괘릉의, 서역인 형상을 한 무인상이 그것이다. "당당한 체격, 꼬불꼬불한 턱수염과 곱슬머리, 머리에 두른 띠" 괘릉은, 헌강왕보다 약 백년이 앞서는 원성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생각해 보면, 그 원성왕의 능에 있는 무인상의 얼굴 모습이 『악학궤범』의 처용가면 모습과 흡사하다. 그렇게 따지다 보니 경주시 안강읍 외곽의 흥덕왕릉 무인상의 얼굴도 서역인의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통일신라 시기의 것으로 알려진 토용(土俑) 중에도 서역인의 얼굴 모습을 한 것들도 꽤 많다.

 

 

<흥덕왕릉 무인상>

 

『악학궤범』에 전하는 처용의 모습이 이런 얼굴 모습들에 근거하고 있는 것 아닐까? 과연 처용이 이슬람 쪽에서 온 것이 아니냐 추측해 볼 수 있는 정황이다. 역사학자들 중에 처용을 서역, 그러니까 아라비아의 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인 것을 보면, 『악학궤범』의 처용 가면을 신라 말기의 유물에 나타나는 서역인 모습과 엮어보는 이런 추정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결혼 이주 여성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과 결혼하는 한국 여성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사는 동네의 길거리만 해도 하루에 열 명 정도는 동남아시아인 외에도 중동인, 서양인들을 손쉽게 만나곤 한다. 신라시대에도 그랬는데 하물며 글로발(Global) 시대인 작금에야...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