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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아름다운 혁명과 영성의 길을 간 28인의 초상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by 언덕에서 2011. 2. 9.

 

아름다운 혁명과 영성의 길을 간 28인의 초상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윤선생은 좌파요? 아니면 우파요?”

“......”

“MB를 싫어하는 걸 보니 좌파인 것 같고, 이문열을 좋아하니 우파인 것 같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학생시절에 엉터리 운동써클에서 맑스에 대해 공부를 했던 건 사실이나, 이후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모든 환상을 버렸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이 내게 주입한 인간해방의 뒷면에 ‘주체사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거의 패닉상태였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아주 정확하게 자신을 표현하라면 나는 ‘좌충우돌파’이다. 우파의 비인간주의, 무식한 성장주의를 경계하면서 좌파의 무대책한 분배정책과 포퓰리즘에 냉소한다.

 

 설날 연휴 전 모 출판사로부터 기증받은 이 책은 초장부터 읽기가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운동권’ 냄새가 너무 강하게 풍기기 때문에 그 이념을 완전히 수긍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는다고 하면 ‘우이독경(牛耳讀經)’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의 이념적 독백을 제외한 <아름다운 혁명과 영성의 삶을 산 28인의 이야기>는 계속 기억에 남았다.

 특정 이념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결국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이념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을 얻게 만드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나의 신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재야운동권에서 몸담아 온 저자의 사회에 대한 시각 자체가 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선입견도 있었음을 고백하겠다. 저자는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간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 격월간 잡지 《공동선》편집장을 지냈다. 읽을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결국은 읽기로 했다. 연휴가 너무 길어서 별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가톨릭 사회운동에 몸담으면서 영성과 종교, 사회적 실천의 통합에 관심을 기울여온 저자가 수도자, 성인, 신비가 들의 삶과 사상을 살피고 정리한 산문집이다. 저자는 자기 자신과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참된 영성을 찾기 위하여 고뇌하고, 이웃의 고난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며, 하느님께 좀더 가까이 가고자 했던 분들의 삶과 사상에 대하여 글을 썼다고 했다. 이 책은‘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에 다름 아니다.

 

세상과 이웃을 위해 몸 바친 이들의 발자취

 

 이 책『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서문에는 ‘세상과 자신,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서 고뇌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애쓰며,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고자 노력한 수도자, 성인, 신비가들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면서 저자 자신의 삶과 주변을 돌아본 책이다’라고 표현했는데 아주 적절해 보인다.

 

1부 거룩한 갈망--성인의 삶, 무엇을 찾는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창립자 랑세 아빠스는 수도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수도자들이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하느님의 뜻에는 딴전을 부릴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네딕트 성인 역시 수도규칙에서 학문탐구보다 손노동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학문이란 진리와 구별되고, 다만 진리를 찾기 위한 방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부 나를 넘어서, 교회를 넘어서--교회와 나 사이의 거리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만사를 접어두고 새로운 길에 접어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 이후 처음에는 중근동 지방의 사막으로 갔다. 그들은 수도하며 고독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찾았으며, 결국 그 속에 깃든 하느님을 발견했다. (이시도로, 안토니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바실리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성 아우구스티노

 

 오늘날에도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살기엔 복음적 감각이 너무 뛰어나고, 성당이나 교회 안에서 조직적으로 살기엔 너무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평신도 공동체를 이끌었던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도 그랬다.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더 넓게 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 또 하나의 사심 없는 교회를 이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역사를 통해 관찰하면 성인은 늘 교회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3부 가난과 노동, 자연 그리고 공동체--일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라

 성인이란 진공 속에서 이슬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보통사람처럼 일하고 고민하고 기도했다. 자신의 노동과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찾았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 모두가 제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들의 청빈한 삶이 귀감이 되었다. (베네딕트, 피오레의 요아킴, 프란치스코, 글라라, 힐데가르트, 메히틸드, 랑세 아빠스, 에라스무스, 로욜라 이냐시오)

 

성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이 책은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었던 많은 영성과 깨달음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적을 만들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 익숙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모슬렘이나 공산주의자들이 폭력적이라고 하지만, 자본주의의 상품 경제 역시 가난한 이들에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왔다. 가난한 이들과 말 못하는 자연 생태계는 일부 인간의 풍족한 삶을 위해 유린되고 파괴되어 왔다. 성 프란치스코는 모슬렘 문화를 존중했으며, 마호멧을 인정했고 술탄의 종교를 모욕하지 않았다. 오늘날 종교인들이 본받아야할 부분이다.

 

4부 인간을 위한 혁명--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편에 선 이들

물질문명이 발달해온 가파른 역사의 고비에서 갈등과 억압, 차별과 불평등이 뒤엉키고 깊어지면서 이를 고뇌하고 맞서 싸운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교황이나 주교도 있었고, 수도자와 노동운동가, 예술가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희망과 열정에 찬 활동을 벌였으며,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 길에서 교회를 새롭게 변모시키기도 하고, 특별히 참된 인간성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샤를 드 푸코, 레흐 톨스토이, 교종 요한 23세, 로제 수사, 시몬 베유, 조셉 카르댕,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로메로 대주교)

 

라스카사스 주교

 

 세풀베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쟁 정당화 이론과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이용해 남미 인디언과 같은 무지몽매한 인종의 노예화는 합법적인 것이며, 아메리카 원주민은 하느님을 인식할 만한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선교사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스페인의 라스카사스 주교는 “인디언 또한 우리들의 형제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쳤다”고 반박했다.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 온 서구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은 미개하므로 술과 담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그 룰은 지금도 계속된다. 반 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학문을 갖고 있던 우리민족과 전쟁과 침략만 일삼던 서구인들을 비교해 보자. 누가 더 미개한가?

 

5부 우리 시대의 신비주의--신비주의와 사회적 실천을 통합

토마스 머튼은 성인이 행복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한 가지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머튼 뿐 아니라 헨리 나웬과 빈센트 반 고흐도 그 길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는 우리시대에 새로운 환대의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은 자신과 세상의 동시적 변형을 위해 투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신비가이며 동시에 실천가이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 헨리 나웬, 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토마스 머튼

 

 헨리 나웬은 2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존하는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가 오히려 예수를 더욱 멀리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반복되는 의식과 기도문은 지루해지고, 소박함은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즉, 미사에서는 성체성사의 공적이고 조직적인 특성만 너무 강조하다가 결국 개개인의 삶과 맺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20세기의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는 토마스 머튼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베트남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사실은 자신의 깊은 곳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먼저 내 안의 파시즘을 척결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유물론적이 이교도의 영향 하에 놓여져 있다고 보았다. 비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한다고 말했다. 

 

세상의 고난과 아픔에 주목하며,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수도자와 신비가, 성인들은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당대에 벌어지는 숱한 고난과 아픔에 주목했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 차별로 고통 받는 민중의 현실이었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독재 권력의 탄압이었으며 교회의 권위와 인습에 따른 종교 현실이기도 했다.

 

 

 

 

 우리가‘신비가’들을 이야기할 때 이들은‘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눈으로 봐야, 성령의 빛이 비추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에는 간디나 스코트 니어링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더라도 거룩한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사람이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있을 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살아 있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