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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노란 손수건 / 오천석

by 언덕에서 2010. 9. 21.

 

노란 손수건

 

                                                             오천석1(1901 ~ 1987) 

 

 

 

 

 

남쪽으로 가는 그 버스 정류소는 언제나 붐비었다.

 생기찬 모습의 젊은 남녀 세 쌍이 까불거리며 샌드위치와 포도주를 넣은 주머니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플로리다 주에서도 이름 높은 포트 라우더데일이라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였다.

 승객이 모두 오르자 버스는 곧 출발했다. 황금빛 사장과 잘게 부서져 오는 하얀 파도를 향하여. 차창 밖으로 추위 속에 움츠러든 회색의 뉴욕 시가가 뒤로 미끄러져 흘러갔다.

 세 쌍의 남녀들은 알지 못할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흥분 때문에 계속 웃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그들도 뉴저지 주를 지나갈 무렵쯤 되어서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여 조용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자리에는 몸에 잘 맞지 않는 허술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묵묵히 앞쪽만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만으로는 나이가 어림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고 뒤에서 조잘거리는 그 남녀들이 무안해질 만큼 한사코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밤이 깊어서 버스는 워싱턴 교외의 어떤 음식점 앞에 멈추었다. 승객들은 다투어 버스에서 내려 허기진 배를 채웠다. 단 한 사람 그 돌부처 같은 사내만이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그의 거동에 점차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은 멋대로 그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배를 타던 선장일까, 아니면 아내와 싸우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역병사일까?

 식사를 마친 승객들을 태우고 버스가 워싱턴을 떠날 때 일행 중의 용감한 여자가 그 남자의 옆자리에 가 앉아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우리는 플로리다로 가는 길인데 처음 가는 길이거든요. 듣자니까 그렇게도 경치가 멋지다면서요?"하고 명랑하게 물었다.

 "그렇지요" 한참 만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야릇한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렸다. 잃어버렸던 옛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이었을까.

 "포도주 좀 드시겠어요?"

 자신을 얻은 젊은 여자가 그에게 다시 말했다. "고맙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여자가 컵에 따라 주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완강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여자가 다시 일행 가운데로 돌아가자 그는 잠을 청하려는 듯 등을 뒤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었다. 버스가 다시 음식점 앞에 섰다. 이번에는 그 사내도 승객들을 따라 식사를 하러 내려왔다. 어젯밤 말을 붙였던 그 젊은 여자가 그에게 자기들과 자리를 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몹시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마음이 뒤숭숭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 연신 담배를 피워 물곤 하였다. 젊은이들은 즐거움에 들떠 해변 모래사장에서의 멋진 야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소리 높여 재잘거렸다.

 식사를 끝내고 모두들 다시 버스에 오르자 그 젊은 여자가 또 그의 옆자리에 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사내는 그 젊은 여자의 호기심에 두 손 들었다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내의 이름은 빙고.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형무소에서 보내다가 이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결혼은 하셨던가요?"

 젊은 여자가 혀를 끌끌 차고 나서 물었다. "잘 모르겠소.""잘 모르다니요?" 그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무소에 있는 동안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냈었소." 그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할 형편인 만큼 만일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든지, 아이들이 자꾸 아버지를 찾는다든지, 혹은 혼자 사는 것이 괴롭고 고생이 된다면 나을 잊어 달라고 했소.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재혼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여자는 훌륭한 여인이오. 나를 그냥 잊어버려 달라고 썼소. 편지를 안 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이란 말이죠?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소."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은 지난주일 가석방 결정이 확실해지자 나는 또 편지를 썼소. 옛날에 우리는 그때 부른스위크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가 한 그루 있소. 나는 편지에서,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붙들어 매어두라고 말했소. 노란 손수건이 참나무에 걸려 있으면 내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갈 것이라고, 만일 재혼을 했거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고. 나도 잊겠다고 썼소.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건 가 버리는 거요."

 여자는 깜짝 놀랐다.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일행들도 빙고가 보여주는 아내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제 잠시 후에 전개될 광경에 대해서 지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마치 자기들의 일이기나 한 것처럼 모두들 흥분에 들떠 제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폈다.

 꾸겨지고 낡아빠진 빙고의 사진 속에는 부인과 세 자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부인은 비록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 속에는 착한 마음과 얌전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었다. 사진 속의 어린애들은 아직 어렸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마침내 이정표는 부른스위크가 20여마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젊은이들은 모두 오른쪽 창문 옆자리로 다가붙어 빙고가 말한 그 커다란 참나무가 나타나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 이야기는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해져 부른스위크가 가까와 올수록 버스 안에는 뒤숭숭한 설렘의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이상스런 정적이 버스 안을 채웠다. 어두컴컴한 침묵의 구름에 휩싸인 듯한 버스 안의 분위기는 마치 빙고라는 사나이가 집을 비운 그 잃어버린 세월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빙고는 그대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흥분한 표정을 보이거나 얼굴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굳어진 그 얼굴에서 누구라도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이제 곧 눈앞에 나타날 그 실망의 순간을 대비하여 마음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같이도 보였다.

 마을과의 거리는 20마일에서 15마일로, 다시 10마일로 점점 가까워졌다.

 물을 끼얹은 듯한 버스 안의 정적은 계속되었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이 꿈결에서처럼 아스라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고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젊은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치며 춤을 추듯 뛰었다.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빙고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멍하니 넋 잃은 사람처럼 차창 밖 멀리 보이는 참나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나무는, 그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가 바람 속에 환영의 깃발로 마구 물결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치고 있는 동안, 늙은 전과자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앞문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청소년 시절에 <노란 손수건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유혹에 빠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충동성이 강한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가정의 가난과 부모님의 불화, 주변의 불량 청소년 때문에 좌절하고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만약 그때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노란 손수건>이란 책에 실린 짧은 이야기들은 온통 진실과 감동의 집합체이다.  이 책은 용기와 신념을 통해 자신에게 처한 위기를 극복해낸 우리 이웃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들 아시다시피 내용은 주프랑스 대사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오천석 박사가 미국의 잡지에 게재된 실화를 모아서 번역하여 만든 감동의 휴먼 드라마다. 그러니까 오천석 선생이 쓴 수필이 아니라 <번안 실화집> 정도의 표현이 적당하겠다. 위의 글 <노란 손수건>은 책의 표제가 된 내용인 번안 실화 모음집에 수록된 대표 작품이다.

 

<이 글의 영향으로 노란 손수건은 우리 사회의 용서와 화해의 아이콘이 되었다. 모 종교단체에서 노란 손수건 걸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장면>

 

 

 

 이 글을 다시 읽기 위하여 서재 속의 낡은 책을 찾아보았다. 1977년 샘터사 발간……. 빛바랜 누런 종이 위에 세로쓰기로 적혀진 책의 내용들 하나하나는 30~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느 한 곳 수정할 필요 없이 완벽한 감동의 집합 그 자체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진실이라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그 자체가 감동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글의 영향으로 노란 손수건은 우리 사회에서 용서와 화해의 아이콘이 되었다. 좌절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남녀노소 누구라도 삶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는 날, 희망의 등불이 약해지는 날, 누군가에게 의지해 보고 싶은 날, 조용하게 이 책 속의 글들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1. 오천석 : 교육자, 전 문교부 장관. 1925년 미국 코넬대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1962~63년 미국 맥머리대학·일리노이대학교·피바디대학 등에서 초빙교수를 지냈고, 1963~67년 주멕시코 대사, 1965년 국제연합 총회 한국대표 등을 지냈으며 1976년 학술원 회원(교육철학 분야)이 되는 등 한국 교육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1946)·〈교육철학신강〉(1972)·〈교육사상전집〉(1975)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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