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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서머싯 몸 단편소설 『현상과 실재(Appearance and Reality)』

by 언덕에서 2025. 10. 23.

 

 

 

서머싯 몸 단편소설 『현상과 실재(Appearance and Reality)』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단편소설로 1934년 [코스모폴리탄]에 처음 발표되었고, 이후 1947년 단편집 <Creatures of Circumstance>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인간의 허위의식과 사회적 가면을 냉정하게 서술한 작품이다. 단순한 ‘불륜 이야기’를 넘어 현대 사회의 병리적 구조를 깊이 표출하는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 르 수에르는 겉으로는 점잖고 관대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내연녀 리제트가 자신을 배신할까 두려워하는 불안과 소심함이 깔려 있다. 여주인공 리제트는 세련된 외모와 밝은 성격을 지녔지만, 애인에 대한 애정은 식은 지 오래여서 권태와 이기심에 이끌려 결국 다른 남자를 택한다.

 작가는 '현상'과 '실재'라는 고전적 철학 문제를 인간 심리와 일상적 상황 속에 녹여낸다. 특히 르 수외르가 리제트의 변심을 앞에 두고도 체면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종종 자기기만에 빠지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끝에서 르 수외르는 여전히 품위를 지키려 하지만, 독자는 그 이면에 놓인 쓸쓸함과 당황스러움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30년대 프랑스이다. 상원의원 레몽 르 수외르 씨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리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아름다운 젊고 아름다운 패션모델 리제트를 내연녀로 삼는데 고급 아파트를 마련해 주며 생활을 뒷받침한다.

 리제트는 스폰서이자 내연남인 상원의원 르 수외르에게 고분고분 따르지만, 실상은 젊고 매력적인 연인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르 수외르는 어느 날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분노하거나 관계를 끊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리제트가 그 남자와 결혼하여 ‘존경받는 기혼 여성’으로 사회적 체면을 갖추는 편이 자신의 처지에도 유리하다고 합리화한다. 결국 그는 정부(情婦)의 결혼을 허락하고 지원하기로 한다. 이후에 그는 승승장구하여 장관이 된다.

 장관이 된 수외르는 차에 올라타고 서명해야 할 국사를 생각하면서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내연녀 리제트가 여성복 상점의 일개 모델인 현재보다는 점잖은 유부녀를 겸하는 것이 그로서도 훨씬 낫기 때문이다.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 ( W. Somerset Maugham, 1874~1965 )

 

『현상과 실재』는 작품 제목 그대로, 인간이 외면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현상(appearance)’과 실제 욕망과 감정이 놓인 ‘실재(reality)’ 사이의 틈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서술한다. 작가는 르 수외르라는 인물을 통해, 도덕적 당위나 진정성보다는 사회적 체면과 규범이 훨씬 중시되는 세계를 조소한다. 르 수외르는 분명히 사랑의 배신을 당했으나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자 리제트의 결혼을 허락한다. 이처럼 작가는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체면과 계산에 사용하는 모습을 냉정하고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 작품은 서머싯 몸의 문체적 특징—간결하면서도 은은한 냉소를 띠는 서술, 인물의 심리를 비판 없이 관찰하는 태도—이 잘 살아 있는 단편이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도덕성 붕괴’라는 주제를 내포한다. 사랑, 신뢰, 분노 같은 순수한 감정들은 더 이상 인간 행동의 주된 동기가 아니다. 그 대신에 체면 유지나 사회적 입지 및 이득 계산 등이 인간을 움직인다. 이러한 인간상은 단지 개인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요구하는 가치 체계의 반영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독자에게, 우리가 믿는 ‘사랑’이나 ‘진실’조차도 얼마나 쉽게 ‘사회적 전략’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제시한다.

 문체적으로 보면, 서머싯 몸은 이 작품에서도 절제된 간결성을 유지한다. 그는 과도한 심리 묘사나 도덕적 판단을 피하고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은근히 아이러니를 부각한다. 이 절제는 오히려 독자에게 더 큰 울림을 준다. 또한, 차가운 관찰자의 시선을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등장인물의 심리와 그 허위를 발견하게끔 이끈다. 서머싯 몸의 이런 ‘비개입적 서술 태도’는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 문단에서 ‘모더니즘 이전의 마지막 고전주의자’로 그를 자리매김하게 한 중요한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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