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읽다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黃東奎)

언덕에서 2025. 6. 26. 07:20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黃東奎. 1938∼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 다니는

몇 송이의 눈.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이 시는 투명한 명료성과 간결한 사생력(寫生力)으로 숨겨진 마음의 상태를 정교한 언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물 자체의 정지와 움직임을 그대로 포착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상태까지 살갑게 표현한 경지가  범상치 않다. 시인은 천지가 흰 눈으로 덮여 사물과 경계가 없어진 상태에서 혼자만이 깨어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려는 투명한 정신의 지향을 '눈'이란 상관물을 통해 드러내었다. 즉 지상에 매여 있기를 거부하고 내려앉기를 겁내는 '몇 송이 눈'은 화자(시인)의 정신의 자유로움을 지향하려는 태도의 반영이다. 또 그것은 일상화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정신의 고고한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 국가와 같은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서정적 화자는 짙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고 있다. 이 작품의 서정적 화자가 이런 정서를 느끼는 것은, 이 작품이 제작된 1972년 무렵의 우리 공동체가 바람직한 방향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움직여 나갔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고 한 것은 지난 날 추구해 오던 가치가 이제는 억류된 상황을 의미하며, '길 문득 사라지고'라고 노래한 대목도 같은 사정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서정적 화자가 느끼는 안타까움과 슬픔은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는 돌들과 '한없이 떠다니는' 눈송이의 심상들을 통해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