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소설

이병주 단편소설 『아무도 모르는 가을』

언덕에서 2025. 6. 23. 07:42

 

 

이병주 단편소설 『아무도 모르는 가을』

 

언론인 · 소설가 ·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단편소설로 1980년대 초반에 발표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은 이병주 사후인 2023년  <우아한 집념>, <거년의 곡>과 함께 발표된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세 편의 소설 모두 강렬한 사랑과 인간의 집념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단편소설『아무도 모르는 가을』은 1950년대 후반의 화자가, 일제강점기 시절의 동경 유학생 '나'와 친구 윤효준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전개된다. 인간의 열정과 집념이 어떻게 삶을 이끌어가는지를 말하는, 이병주 특유의 서사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단편 중 하나다.

 단편소설 『아무도 모르는 가을』은 한 여인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이념의 갈등을 통해 개인의 비극과 시대적 아픔을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나'(변호사)가 과거 알고 지냈던 '윤효숙'이라는 여인의 행적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설의 제목  '아무도 모르는 가을'은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사랑의 역사와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은 비극을 아우르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는 화자가 두 사람의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것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50년대 후반, 변호사가 된 화자 ‘나’는 동경 유학 시절의 친구 윤효준과 그의 팔촌 누이 윤효숙을 회상한다. 윤효숙은 의대생으로, 나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이상을 품은 총명하고 고결한 숙녀였다. 세 사람은 지적 교감을 나누며 우정을 유지했지만, 윤효숙은 점차 러시아 혁명가 베라 니콜라예브나 피그네르의 사상에 매료되어 좌익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이념에 몰입하는 그녀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화자와 윤효준에게 깊은 충격과 고뇌를 남긴다. 그러나 그녀의 극단적 변화는 이념보다는 감정의 동요에 가깝고, 그 이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남는다.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윤효숙이 1948년 2월 8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살인지 병사인지 모호한 그녀의 죽음은 비극성을 더한다. 이후 ‘나’는 그녀의 묘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청결하게 살다가 간 처녀의 행복 있으라 - 1955년 10월 10일”이라는 역설적인 비문과 사망일을 발견한다. 이 비문 앞에서 ‘나’는 모든 진실을 깨닫는다. 윤효숙의 이념 편력은 사실 사랑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팔촌 오빠 윤효준과의 사랑이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사회적 금기로 인해 불가능하자 절망에 빠졌던 것이다.

 윤효준은 1948년 2월 5일 결혼했고, 그로부터 사흘 뒤 윤효숙은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작가가 글을 쓰는 1950년 후반을 기준하여) 3년 전, 윤효준 또한 세상을 떠났으며, 유언에 따라 그녀의 묘 건너편 산허리에 묻혔다. 화자 ‘나’는 이 비극적인 진실 앞에서, 사랑을 가로막은 사회의 규범과 그로 인해 파괴된 두 사람 삶의 잔해를 응시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사랑과 개인을 억압하는 운명과 금기에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이었다.

언론인  ·  소설가  · 이병주 ( 李炳注 . 1921 ∼ 1992 )

 

 이 소설의 가장 큰 문학적 성취는 이중적 서사 구조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념'이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념은 허상이었음이 드러나고, 그 자리에 '금지된 사랑'이라는 비극적 진실이 모습을 드러난다. 작가는 이념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대를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그 거대한 담론 뒤에 가려진 개인의 섬세하고 내밀한 고통을 매우 효과적으로 부각한다.

 주인공 윤효숙의 사상적 변화는 이 작품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그녀가 의학도에서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좌익운동가로 변모하는 과정은 정치적 신념의 성숙이 아니라, 사랑의 절망에서 비롯된 심리적 방황의 궤적이다. 현실에서 사랑을 이룰 수 없기에, 그녀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혁명 사상에 위탁하여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이처럼 작가는 이념을 개인의 실존적 고통이 발현되는 하나의 '증상'으로 그려낸다.

 

 

 남성 주인공 윤효준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 '처녀'라는 단어를 새긴 행위는 이 소설의 모든 복선을 하나로 모으는 강력한 장치이다. 이는 사회적 관습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되지 못하고 죽어간 윤효숙의 순결한 영혼을 기리는, 윤효준의 애절하고도 뒤늦은 고백이다. 그는 그녀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명명하고, 그녀의 순수했던 삶을 '처녀'라는 단어로 박제함으로써 세상의 질서에 저항한다. 이 역설적인 묘비명은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을 가장 함축적으로 증언하는 시적인 상징이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은유(metaphor)다. 이는 단순히 두 남녀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넘어, 타인의 눈에는 결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한 인간의 내면 풍경 그리고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비정함을 상징한다. 화자가 마지막에 흘리는 눈물은,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근원적인 고독감과 그런데도 그 슬픔에 공감하려는 인간적인 연민의 표현이다. 이 소설은 결국, 거대한 역사의 기록 뒤에 숨겨진 이름 없는 개인들의 슬픔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역사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베라 니콜라예브나 피그네르 필리포바(Ве́ра Никола́евна Фи́гнер Фили́ппова, 1852-1942 ) : 러시아 카잔 출신으로, 러시아·독일 혼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피그네르는 인민의지당(人民意志黨) 지도부 중 한 명으로서,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사건을 계획하는 데 참여했다. 피그네르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20년간 유폐되었다가 유형에 처했다. 피그네르의 회고록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1917년 2월 혁명 이후 혁명에 평생을 바친 희생자로서 떠받들어졌다. 소련 시절에 피그네르는 정치범 유형수 협회에서 활동하다 1942년 자연사했다. 향년 89세. 자세한 설명은 => https://yoont3.tistory.com/11303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