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중편소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輓詞)』
이병주 중편소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輓詞)』
언론인·소설가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중편소설로 1983년 [한국문학]에 발표되었다. 이후 2006년 [한길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일인칭 화자인 '나'가 70세의 노(老) 테러리스트 동정람을 만나 그의 삶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동정람은 하얼빈에서 태어나 러시아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레닌을 세 번이나 만난 전설적인 인물로, 작가는 그의 삶을 통해 개인의 역사와 민족의 비극을 조명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역사에 가려진, 잊혀간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그의 문학적 방법이 잘 드러난다. 작가는 주인공 동정람의 이야기를 통해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간 한 인간의 상처와 비극을 특유의 휴머니즘으로 풀어내며, 역사의 행간 속에 사라져간 개인의 역사와 비극을 되살려낸다.
동정람은 낭만적 급진주의자다. 식민지 시기와 전후 혼란을 겪으며, 세계의 모순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한 실천의 길로 나아간다. 그는 혁명과 테러를 통해 부조리를 바꾸려는 의지를 품지만, 그 끝은 허무와 파괴로 귀결된다. 반면 또 다른 등장인물 하경산은 체제 안에서 고뇌하는 현실주의자다. 그는 동정람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보다 이성적이고 관찰자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동정람을 애도하는 그는 ‘반성하는 자’이며, 자신의 무기력을 인식하면서도 체제의 경계 너머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두 사람은 한 시대를 가른 두 갈래의 지식인상이며, 이병주는 이들의 대비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윤리적 딜레마를 심층적으로 드러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80년대 초, 잡지사 기자인 ‘나’는 원고 청탁을 위한 여행 중 경남 통영에서 기묘한 노인 동정람을 만난다. 그는 70세가 넘은 나이에 천연덕스럽고 능청스럽게 말하며, 자신이 러시아 혁명 시절 레닌을 세 번 만났고 트로츠키의 통역을 맡았으며,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했다고 주장한다. 처음엔 허풍처럼 들리던 그의 말은 점차 사실처럼 느껴지고, ‘나’는 그의 삶에 점점 빠져든다.
동정람은 하얼빈에서 태어난 한인 2세로, 일본 식민지 지배와 러시아 혁명이라는 두 거대한 역사적 격동 속에서 살아왔다. 젊은 시절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그는 트로츠키파에 몸담고 유대계 혁명가들과 교류했으나, 트로츠키 실각 이후 스탈린 체제에서 숙청 위협을 받아 중국으로 피신한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관여하지만, 해방 후에는 좌우 이념 갈등 속에서 모두의 경계 대상이 되고, 결국 국가보안법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몰려 투옥당한다.
반복되는 감시, 고문, 투옥 속에서 그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혁명은 그에게 무모한 폭력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러시아 여성과의 사랑과 도피, 그리고 이별이라는 비극적 경험도 안고 살아간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단순한 노인이 아닌 “시대의 증언자”로 받아들이며, 그의 삶을 소설로 남기기로 결심한다. 동정람은 사라지지만, 그의 고백은 실패한 혁명가의 진혼곡이자, 한 시대를 꿰뚫는 통찰로 남는다.
이병주의 중편소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輓詞)』라는 제목은 단순한 표제가 아니라, 작품 전체의 주제 의식을 상징적으로 응축한 장치이다. 여기서 '만사'란 본래 죽은 이를 추모하고 명예롭게 떠나보내기 위한 애도와 기림의 글을 뜻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테러리스트'라는 점은 역설적 긴장을 낳는다. 소설 속 동정람은 체제와 시대의 시선에서 보면 '불온한 존재' 혹은 '폭력적 전복자'로 여겨졌지만, 이병주는 그에게 ‘만사’를 바친다. 이는 동정람의 삶이 단지 반체제적 폭력의 표본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시대의 모순 속에서 겪은 고뇌와 이상, 사랑과 좌절의 총체적 삶임을 인정하겠다는 선언이다. 즉, '테러리스트'는 국가가 부여한 이름일 뿐이고, '만사'는 문학이 건네는 존엄의 복권이다. 이 제목은 잊힌 개인의 서사에 바치는 비문이자, 억압된 진실에 대한 기억의 시작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 기억과 개인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망각된 인간’을 복원하려는 작가의 집념이 응축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역사 속에 파묻힌 개인의 진실’이다. 주인공 동정람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인물이지만, 그의 삶의 궤적은 20세기 격동의 동아시아를 살아낸 수많은 민중과 혁명가들의 축소판이다. 동정람은 혁명을 꿈꾸었고, 이상을 좇았으며, 시대의 광풍 속에 부서진 자이다. 그는 일제 식민지, 러시아 혁명, 중국 내전, 한국전쟁, 해방 이후의 이데올로기 갈등까지—한반도 근현대사의 거의 모든 주요 격동기를 통과하며 그때마다 ‘불온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그의 삶은 당대 국가 권력이 규정한 ‘정의’와 ‘악’의 경계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폭력적인지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처럼 특정한 이념이나 체제로 인해 희생된 한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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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는 정람의 회고담을 통해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사실은 누가 어떤 권력의 입장에서 붙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민족주의자였고, 혁명가였으며, 자유를 갈망한 낭만적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 서지 못했고, 항상 그 주변부에서 감시당하거나 처벌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패자의 역사’를 드러내는 이병주 문학의 전형이며, 동시에 작가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의 구현이다. 또한 이 소설은 이야기의 구조상 ‘일인칭 작가 화자’가 노인을 만나 그의 인생을 듣고 기록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형식은 독자에게 정람의 회고가 단지 허구가 아닌 실재했던 ‘증언’처럼 느껴지게 하며, 그의 말과 삶이 역사적 진실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장치한다. 이로써 독자는 단지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어떤 역사적 교훈을 주장하기보다는, 말없이 사라진 한 인간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 자체를 문학의 윤리로 삼는다. 소설의 제목에 쓰인 ‘만사(輓詞)’는 장례식에서 고인을 기리는 시문이다. 작가는 정람을 통해, 그리고 독자를 통해, 이 땅의 수많은 정람들에게 하나의 진혼곡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단지 한 혁명가의 실패담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할 인간의 존엄과 사유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이병주의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하여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서술한다. 특히, 동정람과 '나'의 박학다식한 대화를 통해 인문적인 사고를 확장하며, 독자에게 깊은 사유를 유도한다. 이 작품은 또한 2011년 [이병주 문학 학술 세미나]에서 재조명되었으며, 이병주의 단편 <마술사>와 함께 다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