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천 단편소설 『처를 때리고』
김남천 단편소설 『처를 때리고』
월북작가 김남천(金南天. 1911∼1953)의 단편소설로 1937년 [조선 문학] 6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단편소설 <춤추는 남편>(1937년 ‘여성’ 10월호), <제퇴선(祭退膳)>(1937년 ‘조광’ 10월호), <속요(俗謠)>(1940년 ‘광업 조선’) 등과 함께 자기 고발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제목만 보자면 '아내에게 폭행을 가하고 일어난 이야기' 쯤으로 상상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35년에 발표된 여성작가 강경애의 프롤레타리아 이념이 담긴 단편소설 <원고료 200원>에서도 여주인공은 장편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고 받은 원고료 이백 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하는 문제로 남편과 갈등이 생기면서 뺨을 맞고 집밖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김남천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다른 이유로 처를 때린다. 당시 상대적으로 많이 배운 지식층에서도 여성을 향한 폭력은 일상사였던 셈이니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30년대 일제 하의 경성이다. 주인공 차남수는 왕년의 사회주의자로서 ○○계의 거두였다. 6년간의 감옥살이 끝에 출감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직장을 얻지 못해 변호사 허창훈에게 빌붙어 사는 신세다.
허창훈이 그를 돌보는 것은 그가 ‘옛날에 ○○계의 거두니까 용돈이나 주어 병정으로 쓰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 목적에서다. 이 같은 인물 설정은 식민지하 사상운동과 기생충 같은 삶의 기묘한 위상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차남수는 이 같은 사정을 알면서도 그것을 역이용하여 생활비를 짜낸다.
차남수가 허창훈의 후원으로 신문 기자 김준호와 어울려 출판사 설립을 추진하던 어느 날이다. 부부간에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아래와 같은 아내의 악다구니를 통해서 차남수의 치부(恥部)가 여지없이 폭로된다.
"너두 양심이 있는 놈이면 잡지책이나 내고 신문 소설이나 시 나부랭이를 출판하면서 그것이 다른 장사보다 양심적이라는 말은 안 나올 게다. 새로 난 법률이 무섭지. 직업이 필요했지. 야, 사회주의 참 훌륭하구나. 이십 년간 사회주의자나 했기에 그 모양인 줄 안다. 질투심ㆍ시기심ㆍ파벌 심리ㆍ허영ㆍ굴욕ㆍ허세ㆍ비겁ㆍ인치키ㆍ중개인…. 네 몸을 흐르는 혈관 속에 민중을 위하여 피가 한 방울이래도 남아서 흘러 있다면 내 목을 바치리라."
부부 싸움은 차남수가 김준호와 아내 사이를 의심한 의처증으로 발생했다. 차남수가 김준호를 지목하여 의심하게 된 것은 영악한 속물 김준호에 의해 왕년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완강한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처 입음은 지금의 그가 사실은 김준호 못지않은 속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에 더욱 큰 것이었다. 그러므로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창훈아, 준호야, 아니 누구보다도 정숙아, 나는 너희들과 출판사를 하련다. 아니 장사를 하련다."라고 스스로 다짐하게 된다.
왕년의 사회주의자로서 완강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차남수의 이 같은 심리는 전향 소설의 깊이 있는 독특한 주제인 자기 굴욕감(자굴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그가 생활고에 시달려 옛날의 신념을 잃어버리고 속물화된 아내와 비열한 김준호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오히려 생활과 타협한 자신에게로 돌리는 자기 고발적 문학이다.
얼마 전만 해도 문단을 질타하고 사상을 독려하던 문예 사상가였지만 ‘논평할 시대가 아니라 관망하고 준비할 시대’라는 이유로 붓을 꺾고 유행가 조(調)의 속물적 생활에 젖어들고 만 김경덕의 부끄러움이 있다. 김남천의 중편소설 <속요> 또한 자기 삶을 합리화하려는 속물과 그것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남성과 대비를 부각한 작품으로서 자기 고발정신이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출감한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생활과 심리․의식의 변화 양상을 취급한 이들 작품은 일종의 '전향 소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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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카프의 좌익 문학운동이 비합법화되자 카프 작가들은 구심점을 잃고 개별화되어 버린다. 이때 김남천은 소시민 지식인의 한계를 꼬집는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자기 고발의 문학'을 내세운다. 「처를 때리고」 <등불> 등의 작품은 지식인 작가의 자굴감을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린 작품이다. 이 자기 고발 문학론에 대해 정호웅(영남대 교수)은 ‘전향의 시대에 준엄한 자기 고발의 정신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한다.
일제 파시즘 치하, 작가 정신의 집단적인 와해가 이루어지고 있던 전향의 시대에 직면하여 분열된 주체의 재건을 위한 준엄한 자기 고발정신을 견지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따라서 자기 고발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작가적 태도를 향해 있으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시대 중심의 문제, 그리고 동시대 문학인들의 작가적 태도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사소설(私小說)과 구별되며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한다는 견해가 존재하게 되었다.
☞ 소설가 김남천은 월북 후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 문화전선사 책임자,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까지 올랐다. 그는 단편소설 <꿀>(문학예술 1951. 4)과 <장군의 말씀은 창조사업의 지침이다>(문학예술 1951. 7), <김일성 장군의 영도 하에 장성 발전하는 조선민족 문학예술>(문학예술 1952. 7)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1953년 남로당 계열의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한 후 엄호석과 윤시철 등에게 부르주아 사상의 잔재인 자연주의를 전파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1953년 휴전 직후 남로당계(南勞黨系) 박헌영(朴憲永) 세력을 제거하는 사건과 관련,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숙청되었다.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의 평의원이 되어 [국민문학], [조광]등 황도문학을 선양하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