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교양지 [사상계(思想界)]
종합교양지 [사상계(思想界)]
1953년에 창간되었던 월간 종합잡지로 [사상계사] 발행으로 발행인은 장준하였으며 뒤에는 부완혁이었다.
이 잡지는 애초 1952년 8월 당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였던 [사상(思想)]으로 출발하여, 당시 6ㆍ25전쟁의 와중에서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주의의 확립 및 반공정신 앙양 등 전시하에 있는 지식인층의 사상운동을 주도하는 사상지(思想誌)로 창간되어 통권 4호를 내었다.
그 뒤 이 잡지의 편집에 참여하였던 장준하가 1953년 4월에 단독 인수하여 [사상계(思想界)]라는 제호로 시판함으로써 본격적인 종합교양지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A5판 100면 내외로 발행되다가 400면 내외로 증면하였으며, 창간호 3,000부가 발간과 동시에 매진되고 전후(戰後)의 사상적 자양으로서 1950년대 지식인층 및 학생층 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편집의 기본 방향은 ① 민족통일 문제, ② 민주사상의 함양, ③ 경제발전, ④ 새로운 문화창조, ⑤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창간 취지로 편집후기에 “사상계란…… 동서고금 사상을 밝히고 바른 세계관ㆍ인생관을 수립해 보려고 기도한다.”라고 밝힘으로써 발행 초기에는 정치성을 배제하고, “종으로 5,000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으로 만방의 지적 소산을 매개하고 공기로서 자유ㆍ평등ㆍ평화ㆍ번영의 민주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사세 확장에 따라 ‘동인문학상ㆍ사상계논문상ㆍ사상계번역상ㆍ신인문학상’ 등 사상 및 문예활동의 본산을 하였다. 아울러 제3공화국 아래에서 자유언론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1962년에는 발행인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3공화국 때 저항적ㆍ정치 비판적 민족주의 논조에 비중을 둔 정치평론이 빈번하여짐에 따라 정치 탄압의 수난을 당하게 되고, 발행인 장준하가 정계에 진출함에 따라 1968년에 발행권을 부완혁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 뒤 계속되는 경영난의 어려움에다 1970년 5월에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당국의 폐간 처분받아 통권 205호를 끝으로 1970년 9월 폐간되었다.
당시로서는 최장수의 지령을 기록하였고, 학계ㆍ문화계에 많은 문필가를 배출한 공적을 남겼는데, 1950∼1960년대의 계몽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이념 지향적인 면에서 한국 잡지사에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 발행인이던 부완혁은 법정투쟁을 통해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사상계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라는 판결을 받아냈으나, 운영상의 여러 가지 악조건 때문에 발행되지 못하였다.
[사상계]는 당시로는 최장수 지령을 기록하고, 학계ㆍ문화계에 많은 문필가를 배출하는 등 정치ㆍ사회ㆍ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완혁(夫琓爀) :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제주이다. 1936년 3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39년 3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1941년 12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인 1941년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1942년 1월 경상북도 내무부 지방과 속(屬)을 시작으로, 1944년 11월 경상북도 선산 군수로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 9월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조교수, 같은 해 12월 부교수에 임용되어 강의했다. 1947년 4월 과도정부 외무청 문서과장, 8월 과도정부 중앙물자행정청 사정과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8월 국무총리 비서관, 1950년 5월 내무부 장관 비서관, 6월 내무부 총무과장, 1952년 4월 기획처 물자동원국장, 8월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 서리를 지냈다.
이후 관직을 떠나 1955년 7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맡았으며, 1961년 1월부터 12월까지 [조선일보] 주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사임했다.
1967년 신민당에 입당해 중앙상임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등을 지내면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67년 12월 장준하(張俊河)로부터 월간 종합잡지 『사상계』를 인수받아 발행인 겸 사장을 지냈다. 1970년 6월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사상계]에 실어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사상계]는 폐간되었다.
이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1975년 12월 율산알루미늄공업주식회사 회장, 1976년 4월 율산실업주식회사 회장, 7월 율산건설주식회사 회장 등 사위 신선호가 설립한 율산그룹의 회장을 맡았다. 1977년 4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78년 10월 [민족문화추진회] 이사를 지냈으며, 1984년 12월 31일 사망했다. 저서로는 <신제국주의>와 <국제공산당과 세계혁명>, <한국의 좌표를 정하라> 등이 있다. 일제시대 당시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