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읽다

오감도 시 제2호 / 이상(李箱)

언덕에서 2012. 6. 25. 06:00

 

 

 

오감도 시 제2호

 

                                         이상(李箱. 1910 ∼ 1937)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조선중앙일보」(1934. 7. 24)-

 

 

 

 

 

<영화 '금홍아, 금홍아'의 한 장면>

 

 

 

 

 


 위의 시는 난해하다고 소문난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중 제2호입니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이 시에 관한 여담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상(李箱)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하셨네요. 1933년경 이상이 황해도에서 금홍이와 알고 지낼 때 그곳 이발소에서 시상(詩想)을 얻었다는 것이지요. 평소에 수염이 길었던 이상이 면도를 하고 난 후 자주 가던 이발소에 갔는데 이발사는 그에게 전에 온 분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다는 겁니다. 수염을 깎았으니 훨씬 젊은 사람으로 보인 탓이었겠지요.

 이상(李箱)의 작품들을 분석한 무수한 논문들을 접해보아도, 위의 <시 오감도 제2호>를 깊이 있게 분석한 논문은 좀체 찾아보기 힘듭니다. <시 제2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의미를 잡을 수 있습니다.

 화자 옆에서 졸고 있는 아버지는 늙고 무능한 아버지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린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이지요. 아버지를 버려야 하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습니다.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 시인은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야 하는지' 라며 이미 아버지보다 정신적으로 훌쩍 커버린 자신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이 마지막 구절에 대한 해석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이렇게 의미를 파악해 볼 때, 이상의 <오감도 시 제2호>는 그냥 하나의 말장난이나 잠꼬대 정도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콤플렉스를 다룬 시 중에 이보다 절묘한 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제2호>가 배경이 될 때, <시 제1호>에서 왜 아이들이 공포 속에서 질주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더욱 잘 부각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이루어놓은 공포의 상황 가운데서 13의 아해들이 질주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상(李箱.19101937) : 

시인⋅소설가. 본명 김해경(金海卿). 1910년 9월 23일 서울 사직동에서 김영창(金永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집으로 옮겨가 조부모의 손에 의해 자라났다. 1917년 신명학교에 입학, 4년 후인 1921년에1921 이곳을 졸업하고 동광학교 중학과정에 입학했다.

 1924년 동광학교가 보성고보에 편입되면서 보성고보 학생이 되었다. 고유섭, 이헌구, 임화 등이 동기였으며 김기림, 김환태가 1년 후배였다. 1926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미술부에서 그림을 습작하면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쾌활한 시기를 보냈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어 조선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기수(技手)로 특채되었다.

1930년[조선]에 처녀 장편 <12월 12일>을 연재했다. 1931년[조선]에 단편소설 <휴업(休業)과 사정(事情)>을 발표하고,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조감도(鳥瞰圖)>등을 발표했다. 1933년 폐결핵으로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기생 금홍을 알게 되었다. 종로에 다방[제비]을 열어 금홍과 동거하면서,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인택, 조용만 등 다방을 출입하던 문인들과 어울렸다.

1934년[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烏瞰圖)>를 연재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는 중단되었다. 이 무렵 이태준,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이무영 등으로 구성되어 있던 [구인회]에 가입하였고, 이들과 교유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경영난으로 <제비>의 문을 닫은 이후 카페와 다방의 경영을 시도한 적도 있다.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았다.

이 무렵 소설 <지주회시>, <동해>, <날개>, <봉별기>, <종생기>, <지주회시>등을 발표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여러 편의 시와 산문도 발표했다. 1936년 후반에 동경으로 건너갔지만 1937년 일본 경찰에 의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구금되었다가 건강 악화로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37년 4월 17일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