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스며드네 / 허수경
저녁 스며드네
허수경 (1964 ~ )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문학과사회 2002년 봄호)
저녁에 먼 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모여 앉아 고기를 구워먹고 있네요. 저런, 풋고추와 상추, 깐 마늘도 양념장과 함께 먹겠군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평화스런 분위기 속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데, 어떤 친구는 자식을 잃고 또 어떤 친구는 집을 잃고 또 사업에 망해 겨우 살아남아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군요. 시인은 저런 풍경을 하루가 저무는 저녁 풍경과 곁들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를 읽으니 요즘 중년들의 일상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네요.
우리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식당에 갑니다. 그런데 다들 이유가 있어서 만나지요.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만났다가 처음에는 고기를 구워 먹느라, 나중에는 술에 취해서는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라고 말합니다. 어느 소설가는 이 시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라고 말하는 부분이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음식문화지만 이게 가끔은 마음에 든다고 썼더군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가난하게 살 경우가 다반사잖아요? 가난하게 산다는 건 신세진 것 없어도 끊임없이 쓸모없는 충고를 들으며 살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온갖 교양적인 충고들 앞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의 심경은 어떨까요?
저녁 스며들 때의 오랜만의 만남은 어색할 때도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 라며 고기만 구워 먹을 수도 있고. 볼이 미어터지도록 상추쌈을 입에 넣을 수 있으며, 아무 말도 안 할 수 있는 풍경이 이 시에서 그려집니다. 만나는 모든 자리마다 반가운 척 떠들어야 된다면 저녁이 불편하겠네요. 스며들 때는 그냥 스며드는 것. 저녁이 스며드는 풍경, 요즘 제가 자주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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