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읽다

그 봄비 / 박용래

언덕에서 2012. 4. 2. 06:00

 

 

 

그 봄비

 

                                                   박용래(1925∼1980)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박용래, 향토적인 정서를 시적 여과를 통해 간결하고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한 갈래를 형성한 분입니다. 또한 그는 향토적인 사물을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지요. 시류(時流)에 흔들리지 않고 타인을 눈치 보는 일 없이 자리 잡힌 자세로 자기의 아늑한 세계 안에서 꾸준하게 정진해 온 집착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그의 시는 모두 아름답습니다. 향토적인 사물이나 현상의 구석구석에 편재(遍在)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그 에스프리를 추려 극도로 간결한 표현으로 그 행간(行間)의 여백을 더욱 중시하는 방법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시인 박용래 보다 열세 살이 연상인 백석도 “돌절구에 천상수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래기타래가 말라 갔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김장독 빠져나간 허전한 자리를 메우려고 모이는 그 봄비, 헛간 시래기 줄에 모여 우는 그 봄비. 그 봄비는 비천함을 달래고, 텅 빈 고향을 달래고, 헛헛한 마음을 달랩니다.

 박용래의 시는 일체의 인위적인 조작과 기교적인 언어를 배제한 채 근원적인 향토애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소박하고 맑은 심성이 근원에 놓여있다고 적은 글도 보았네요.

 그의 작품은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되, 그 정서를 시적으로 여과시켜 시어의 정수(精粹)만을 골라 형상화시키고 있습니다. 언어의 군더더기를 일체 생략하고 시적 압축을 통해 섬세하고 간결한 함축미는 미의 극치를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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