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읽다
가을편지 / 고은
언덕에서
2011. 10. 24. 06:00
가을 편지
고은(高銀 ; 1933~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비탈진 가을 산을 힘차게 오릅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이 기억났어요. 젊어서야 제 몸 스스로 힘을 얻지만, 나이 들면 오직 먹는 것으로 몸을 유지한다고……. 바람에 자작나무는 기우뚱 흔들리고 늙은 할매 같던 싸리나무는 노랗고 정답게 물들고 있습니다. 곧 겨울이 오겠지요. 당단풍나무 잎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붉게 물들었고, 홍시처럼 익은 주황색 이파리들도 곱습니다. 이러한 가을빛 가득한 산길을 걷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단풍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군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서서 뒤돌아봅니다. 추억의 아래위를 일렁이는 단풍잎의 흔들림을 따라 지나간 추억이 어떻게 남았는지가 보이는군요. 행여 실오라기만한 애절함이라도 남아있거들랑 편지를 한번 써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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