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호승 (1950 ~ )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 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1978[열음사]
‘순결한 동심의 정서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
어느 문학평론가의 간명한 표현처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지요.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도 높은 서정세계는 그의 시 곳곳에서 정감있게 펼쳐집니다. 특유의 순결한 동심의 정서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을 일관되게 유지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는 값싼 감성을 자극하는 싸구려 신파극이나 요즘 베스트셀러 순위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시와는 자못 다르지요. 무엇보다도 그의 순정한 사랑과 동화적 시심의 뒤란에는 가난과 소외, 불행과 고통에 대한 동정과 타자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 생채기를 치료하는 어머니 젖가슴과 같은 '따뜻한 슬픔'이지요.
눈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요? 하늘을 비행하는 새가 폐속에 공기주머니를 차고 태어나듯이 슬픔과 고독은 인류가 존재하면서 생긴 것이지요. 우리가 보낸 불면(不眠)의 시간은 허다하고 발목을 걷고 폭우가 내리는 냇길을 매일 걷습니다. 앞이 캄캄해서 내일이 보이지 않았던 날은 어떠하며 상심의 고통 때문에 길 잃은 시간은 얼마나 많았는지요? 어떤 날은 내가 허술해 보이고 서있는 자리 모두가 폐허처럼 보입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표현이 가슴을 칩니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러 퍼지는 것이라니 시인의 수정 같은 감수성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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