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의 '메데이아'와 『슬픈 궁예』
그리스 신화의 '메데이아'와 『슬픈 궁예』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다보면 악녀 '메데이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날 테살리아의 왕 아이손은 정치가 갑자기 지겨워진다. 그래서 그는 이복동생인 펠리아스에게 잠정적으로 왕위를 물러주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손의 아들인 이아손이 자라서 왕위를 돌려달라고 하자 펠리아스는 왕위를 돌려주기 싫어서 흑해의 동쪽 끝 머나먼 콜키스에 있는 황금양털 모피를 찾아오면 돌려주겠다고 한다. 이에 이아손은 원정대를 모집하는데 여기에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멜레아그로스, 네스트로 등 그리스의 영웅들이 모두 모인다. 이 원정대를 우리는 <아르고 원정대>라고 부른다.
<아르고 원정대>는 그리스 최초의 원정대였다. 원정대는 테살리아 해안을 떠나 여러 곳을 방문한다. 여자만 사는 렘노스 섬에서 여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는가 하면, 어떤 섬에서는 괴물들을 몰살하기도 하고, 강풍을 만나서 선발대가 돌아오는 바람에 적으로 오인해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 선발대는 여러 난관을 헤치고 콜키스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이아손은 콜키스 왕의 딸인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황금양털 모피를 훔치고 메데이아를 데리고 탈출한다.(이 부분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 '메데이아'란 여자였다. 그녀는 이아손을 따라올 때 데려온 자기 동생을 난도질해 죽이고, 펠리아스의 딸들에게 접근해서는 그 아버지와 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뿐만 아니라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자신을 배신하고 코린토스의 왕녀 크레우사와 결혼하자 그녀를 독 묻은 옷으로 죽여버린다. 그리고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의 아이들을 찔러 죽이고 궁전까지 불태우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만행이란 만행은 다 저지른다. 나중에 그녀는 동쪽 멀리 떨어진 아시아 땅으로 도망가서 이란고원의 서쪽에 정착해 사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메데아로 불렀다. 이 메데아는 페르시아와 매우 가까워 기원전 549년 페르시아에 합병을 당한다. 따라서 그리스인에게는 메데아가 오랜 적수인 페르시아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곳인 것이다.
이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 전체를 통해 가장 표독스럽고 잔인하며 용서할 수 없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것을 그대로 믿어야 할까? 모든 나쁜 짓은 메데이아가 한 것이고, 그리스의 영웅들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그리스의 영웅들이 렘노스 섬에서 여인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은 그리스인이 렘노스 지역의 여인들을 사정없이 유린한 것을 편리하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 여자만 사는 섬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별도로 유린했을 것이다. 괴물이라고 묘사된 것도 알고 보면 그리스인에게 적대적인 종족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없는 괴물이 과거라고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메데이아와 관련된 사건도 따지고 보면 그리스인이 콜키스에 들어가 고관대작들을 매수하고 이간계로 서로 싸우게 한 후 그 보물들을 약탈한 사건일 것이다.
말이나 기록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나 그 후손들은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을 간신.역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유명한 책과 기록이라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메데이아를 지옥의 악녀로 둔갑시킨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그리스의 영웅들이 다른 나라를 무대로 나쁜 짓 한 것을 대신 감당하게 하고, 둘째는 그리스의 강적 페르시아에 대한 증오를 메데이아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기원전 760년경부터 해상무력을 기반으로 지중해 지역에 식민지 건설을 시작해 각 지역의 원주민을 노예화하기 시작한다. 사실 말이 해상무역이지 약탈과 노략질이나 다름없었다. 유명한 경제학자 좀바르트는 "그리스 상인은 영웅이 아니면 해적이고, 로마 상인은 자기 돈과 노예를 부리는 대실업가이고, 아랍상인은 모험가"라고 지적한 바 있다. 상인으로는 가장 저질이 그리스 상인이라는 얘기다.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페르시아는 그리스가 이겨내기에 매우 힘든 강국이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대규모 침공을 두 번이나 막아냈지만, 결국 주축국인 아테네가 폐허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페르시아에 대해 유감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메데이아에 대해 온갖 저질의 모략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반만년 유구한 우리 역사에는 이러한 부분이 없을까? 유감이지만 우리 역사에도 이러한 부분의 모략과 왜곡은 넘치고도 넘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궁예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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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궁예를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고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도 궁예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흔히 '정사'라고 불리는 공식 역사편찬은 국가 권력의 전유물이었던 만큼 그 의지에 맞게끔 재편집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속적 권력의 패배자들은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 반면 승자의 목소리만 남아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궁예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다. 의자왕, 연개소문, 최영, 광해군 등도 같은 부류이다.
'궁예학' 전문가인 역사학자 이재범의 책 <슬픈 궁예>를 살펴 보도록 하자. 이재범은 대표적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 궁예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 삼국사기에서는 부인 강씨만을 무쇠방망이로 쳐서 죽였다고 하였는데 고려사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부녀자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에서는 음부를 쳐서 죽였다고 한 데 비해 고려사에서는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였다고 묘사를 하고 있다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얼른 눈에 띄는 부분만 비교하여도 궁예 사료는 과장과 변조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은 그대로 후대의 사가들에게 이어져 궁예는 마치 악인의 전형처럼 굳혀졌다. 대표적으로 친일 사학자 이병도는 궁예를 성격이 포악하여 스스로 묘헐을 판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그 뒤 사회적 존재로서 궁예를 재평가한 사람은 김철준으로 그는 후삼국 시대를 우리 역사상 가장 자율적인 발전 가능성이 컸던 시기라고 하면서 이 시대를 이끈 사회적 주체세력의 하나로 궁예의 '군도세력'을 들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투탁한지 3년만에 독자세력으로 독립했다. 궁예가 3년만에 홀로 서서 건국할 수 있었던 비결로 혹자는 이를 궁예의 외가가 대단히 실력있는 가문으로 그 외가의 음덕으로 주변호족들과 연합해 세력을 형성해 나갔을 것이라고 하는데 반해 저자는 궁예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어떠한 기반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다양한 전략 전술을 구사하면서 정벌지역을 확대해나간 지장으로서의 궁예를 지적하고 있다. 그 근거가 궁예가 정벌한 지역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다양한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습, 격파, 격취, 공위, 등으로 표현된 공격에 의한 감제적인 점령 지역과 내항, 내토, 항, 귀복 등으로 표현된 피점령지의 자발적인 복속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그의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데로 역사는 승자를 위한 기록일 따름이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말년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들은 그로 인해 모든 업적이 낮추어 평가된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낮춤의 수준을 넘어선 의도적인 폄하에 의하여 전혀 다른 인물로 각색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역사는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 하에서 평가되어져야 한다.
그럼,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해서 평가해보도록 하자. 처음 태조 나이 20세 때 꿈을 꾸었는데,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그 위에 올라가보았다.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의 한 부분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때 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후삼국시대에 역사적 실체로 등장한 호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자연히 궁예를 재평가하려는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해 최근에는 미치광이 취급만 받던 그가 젊었을 때는 도량이 큰 장수였다는 사실 등이 알려지기도 했고, 그의 뛰어난 전략 전술과 웅대한 도읍건설의 의지에 관한 내용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슬픈 궁예]의 저자도 이런 배경에서 궁예 재조명의 펜을 든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