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읽다

시간을 위한 조곡(組曲) / 홍윤숙

언덕에서 2009. 9. 2. 07:01

 

 

 

 

시간을 위한 조곡(組曲) 

                           - 꽃들의 생애(生涯) 

                                              홍윤숙

 

1.

바람이 종일

산 하나를 헐어내고 있다

 

쉬엄쉬엄

숲을 찍어내고 있다

 

여기저기 단명한 꽃들이

아름다운 소문을 피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아침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다

 

아직은 이별을 모르는

행복한 눈매들이 웃고 있다

 

이제 곧 종이 울리고

커다란 손이

그들의 눈을 감길 것이다

 

2.

아무도 그 손의 임자를

본 적이 없다

 

아침에 분홍빛 장미를

축복 속에 피워놓고

저녁에 지체없이 걷어가는 손

 

꽃들은 이유없이 태어나

유예없이 간다

 

눈물도 사치한 모일(暮日)이 오고

순명(順命)의 아픈 지혜

가시로 꽂히는 저녁

 

더러 맑은 혼들이 무리를 빠져나와

차디찬 이슬로 맺히기도 하지만

이내 작은 바람을 놓아

허실의 꿈을 일깨운다

 

참 이상한 손

손의 임자다

 

3.

노을이 저녁 뜰에

새빨간 유서를 뿌리고 돌아간다

 

꽃들이 아름다운 최후를 진술하고

두꺼운 책장을 하나씩 닫는다

 

뜰은 남은 이야기를 지우며

커다란 손으로 묵화를 친다

 

혼자 사는 사람의

정결한 눈매로 묵화를 친다

 

슬프지도 않은 비극이

날마다 반복되고

 

살아남은 꽃들이

무서움도 없이 어둠 속에 웃는다

 

누가 저 어둠 뒤에 숨어

꽃들의 희망을 흙으로 덮고

 

다시 하얗게 바랜 새벽의 시체를

널고 있는가

 

참담한 것은

아무도 그 손의 집행을

의구하지 않는 일이다

 

아침이면 말갛게

꽃들의 죽음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 계간지 <창작과 비평 1976년 가을호>

 

 

 

 

 


 

 

 


 

내가 이 시를 읽은 시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당시 대학생이던 형님이 읽던 '창작과 비평'이란 몇 년 지난 계간지를 뒤져보다가 발견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때는 1978년이다. 당시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을 때라 쉴 때마다 뭔가를 읽고 싶었는데 가난한 우리 집에서는 읽을 게 별로 없었다. 하다못해 집안의 족보(族譜)까지 꺼내어 달달 외울 정도로 읽고 또읽고 했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당시 우리사회에서 최고의 지성들이 읽는 격조 높은 문예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소한 인문대 학부(學部)는 마쳐야 소화가 가능한 어려운 내용들로 편집되어 있었는데 1/3 정도가 시와 소설이어서 그래도 고등학생인 내가 읽을 부분이 조금은 있었다.

 어린시절 내가 좋아했던 시를 생각하다가 위의 시 '꽃들의 생애(生涯)'를 기억해내게 되었다.

 물론 성장하면서 이사(移徙)를 하고 또 형제들끼리 분가(分家)를 하고 결혼을 하고 또 이사를 여러 번 한 관계로 예의 그 낡은 잡지 '창작과 비평'지는 찾을 수 없었다.

 며칠동안 기억을 되살려 낸 끝에 '시간을 위한 조곡(組曲) '이란 주 제목과 '꽃들의 생애(生涯)'란 부 제목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내 잃어버린 기억의 한 토막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특히 '바람이 종일 / 산 하나를 헐어내고 있다 / 쉬엄쉬엄 / 숲을 찍어내고 있다'는 첫 구절은 뭐라 형언할 수없이 감동적인 구절이어서 기쁨은 배가(倍加)되었다. 이 시가 왜 그다지 좋았는지는 모르겠다. 연애하는 청춘남녀들이 '그냥 당신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홍윤숙(1925~ ) 시인의 시들은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에 입각하여 정감에 흐르지 않고 감정을 억제해가며, 사물이나 관념을 통해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정서의 충일을 균형 있게 조절하는 시인은 지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다. 또한 시를 통해 자기 확인이라는 주제를 하나의 여로를 통해 드러내며 이 과정에서 생에 대한 긍정과 현실에 대응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어떠한 시도 침묵을 능가할 시는 없다. 어떠한 삶도 또한 침묵을 능가할 삶은 없다. 침묵 앞에 내 삶은 유희(遊戱)고 내 시도 유희(遊戱)다. 유희(遊戱)란 영원히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내 시도 불완전하다"는 시인의 시론은 증언과 침묵으로서의 현실대응을 효용성 있게 조화하는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의 대비가 있다.

 <꽃들의 生涯>에서는 참담하고 하얗게 시체(屍體)되어 널려 있는 손의 집행과 꽃들의 죽음을 잊어야 하는 숙명으로 보이고 있다. "누가 저 어둠 뒤에 숨어 꽃들의 희망을 흙으로 덮고/다시 하얗게 바랜 새벽의 시체를/널고 있는가."란 신랄한 꽃의 옹호, 생명의지의 옹호에 그것에 대응하는 침입자로서의 손의 집행에 대한 증언을 나타나고 있다. 얼핏 읽으면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시의 뒷면에는 가락과 시의 서정성이 배제되고 가능한 한 메시지 전달이라는 지성적인 구호가 난무하고 있다.

 이후......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홍윤숙 시인의 시는 '우리' 의식의 역사적 공동체 운명을 따르며 그 동참의 사랑을 노래하는 여유를 가진다. 따라서 1970년대의 숨 가쁜 절규가 한결 투명한 서정을 바탕으로 변모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메시지 형식으로서의 한 유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을 뿐이다. 망가져 이겨지는 '장미'의 모습이 침묵의 증언으로 등장하지만, 극기적 자세로 사회에 맞서는 정의로움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며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