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영화라기에는 완성도가 높았던 영화 <운명의 손>
1954년에 개봉한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은 6·25전쟁 직후 반공물의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로 내용이나 완성도 보다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키스 장면'이 삽입된 영화로 더 많이 알려진 영화이다. 작품의 완성도 역시 당시의 통속 대중영화로선 일정한 수준을 가진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배우 윤인자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당시 입술을 대는 정도의 가벼운 키스였지만 사회적인 면에서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동시녹음 영화제작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시점에서 제작된 영화라 배우들의 대사는 모두 성우에 의한 더빙으로 처리되어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난점이 다소 있지만 당시 한국 영화로서는 보기가 드문 미스터리와 스릴 그리고 비극적 주인공들의 로맨스가 절묘한 삼박자를 이루면서 한 편의 누벨바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특무대 장교 신영철은 고학생으로 위장하여 임무를 수행하던 중, 도둑으로 몰려 마가렛의 도움을 받는다. 마가렛은 술집의 댄서로 활동하는 여자로 사실 북한의 간첩이다. 두 사람은 부둣가에서 재회하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영철은 마가렛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마가렛은 임무와 영철 사이에서 고뇌하고, 영철은 그녀에게서 거리를 두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영철은 자신이 특무대 장교임을 밝히고, 마가렛과의 관계를 청산하려 한다. 그러나 마가렛은 영철을 산으로 유인하고, 결국 그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마가렛은 영철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지만, 영철은 주저하며 그녀를 쏘지 못한다. 마가렛은 영철 대신 총알을 맞고 빈사 상태에 빠진다. 마가렛은 영철의 사랑을 확인한 채 쓰러져가고, 영철은 그녀에게 입맞춤하며 눈물을 흘린다.
멀리서 총성이 울리며, 마가렛의 죽음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철은 사랑과 임무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만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사 최초로 키스 장면을 도입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윤인자와 이향이 연기한 장면은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를 위해 감독이 배우를 1주일간 설득한 일화도 전해진다. 이외에도 영화는 전반적으로 무성 영화의 영향이 남아있어 대사보다는 음향과 연출로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주연 배우 윤인자와 이향의 호연과 더불어, 영화의 긴장감 넘치는 첩보 스토리, 그리고 사랑과 임무 사이에서의 갈등을 잘 표현한 이 영화는 전후 한국 영화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여주인공의 생활 공간이 아파트라는 점에 놀랐다. 이는 미국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생활 공간과 흡사했다. 3~4층의 건물에 들어가면 복도에 문이 있고, 문을 열면 홀과 같은 공간에 테이블과 소파가 있으며 홀의 끝 쪽에는 침대가 보이거나 침실 방문이 보이는 구조가 그것이다. 한국전쟁 직후의 가난한 나라에 일반 가정주택이 아닌 서양식 아파트가 있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에 관한 호기심이 커지면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의 영화 몇 편을 추가해 보면서 유심히 관찰했는데 당시 한국에 의외로 아파트식의 공동주택 공간이 많다는 사실이 놀랐다.
어쨌든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첩보와 사랑 그리고 희생을 다룬 반공 영화로, 특무대 장교와 북한 간첩 사이의 사랑과 갈등을 그렸다. 영화는 당시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반영하여 반공 메시지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감정적 딜레마와 선택에 집중했기에 ‘그때는 어쩔 수 없었지’라며 안쓰러움과 경이의 시선으로 감상했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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