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장편소설 『요셉과 그의 형제들(Joseph und seine Brüder)』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 (Thomas Mann.1875∼1955)의 장편 역사소설로 1933년부터 1943년 사이에 발표되었다. 이 장편소설은 1926년 12월에서 1936년 8월까지와 1940년 8월부터 1943년 1월까지, 약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집필에 소요되었다. 자료를 찾기 위한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이 작품에 쏟아부은 시간은 20년에 가깝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작가는 독일 나치정권의 집권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스위스 및 미국 망명 생활을 경험했다.
이 장편소설은 ●1부 <야곱 이야기>(1933), ●2부 <젊은 요셉>(1934), ●3부 <이집트에서의 요셉> (1936), ●4부 <양육자 요셉>(1944) 등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치스 발흥으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을 작품 속에 요약한 이 작품은 토마스 만에 있어서는 조국으로부터의 망명을 위시하여 다사다난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내용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형제들에게 질투를 사서 이집트로 가는 대상(隊商)에게 노예로 팔린 후, 이집트에서 모진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이인자인 총리대신이 되고 이후 부친인 야곱을 만나고, 자기를 판 형제들을 용서하고, 부양함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는 줄거리다. 이는 결과적으로 히브리 민족의 후손인 모세에 의해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주인공들이 된다. 작품의 제목이「요셉과 그 형제들」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부친 야곱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야곱이 속임수로 형 ‘에서’를 밀어내고 부친 ‘이삭’의 장자 축복을 가로채고부터 ‘요셉’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간 뒤 거기서 사망 후 장사지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은 구약성경 속의 일정 이야기를 신화와 역사가 어울리는 대하소설로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구약성서>에서 소재를 취했으나 현실 도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이 신화 세계에다 현대심리학을 적용하고 있으며 유럽적 인간성을 역사적 기초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나오는 족장 설화(신성한 이야기)인 요셉 이야기를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 의해 출판금지를 당하는 등 탄압받았다. 유대인인 토마스 자신도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추방당했다.
이 소설의 테마는 괴테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결국 내용에서는 히틀러의 나치가 구사하던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신화 추구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나치는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증오하고 게르만족의 부흥과 자민족의 유럽 제패라는 민족 신화를 제시하여 독일인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파시스트들의 구호로 변질시켜 버린 (구약성서 속의) 신화를 파헤쳐, 휴머니즘이 자리하는 신화로 재정립하려는 작가의 집필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약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집필하던 중인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야곱은 그의 외삼촌인 라반의 두 딸과 결혼하게 되는데 억지 결혼한 언니 ‘레아’와 진정으로 사랑한 '라헬' 등 두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슬하에 두고 있었다. 야곱은 오랜 세월 외삼촌에게 봉사한 뒤 천신만고 끝에 아내로 맞이한 ‘라헬’과 결혼할 수 있었다. 이후 야곱은 두 자매의 몸종인 ‘빌하’와 ‘실바’에게서도 자식을 얻었다. 창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된다.
"야곱에게는 아들 열둘이 있었다. 야곱이 레아에게서 얻은 아들은 맏아들 르우벤, 그 아래로 시므온, 레위, 유다, 이싸갈, 즈불룬이었다. 요셉과 베냐민은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단과 납달리는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얻은 아들이요, 가드와 아셀은 레아의 몸종 질바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이들은 야곱이 바딴아람에 있을 때에 얻은 아들들이다. (창세기 35 : 23∼26)
요셉의 형들은 그 동생의 한심하고 철없는 꿈 이야기, 즉 자신들이 동생을 섬기게 될 거라는 말을 하는 사실에 무척 화가 났다. 게다가 그 동생 녀석은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겉모습에서부터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자신들은 항상 거지꼴의 목자들이었는데, 동생 요셉은 채색옷을 입은 도련님이었다.
야곱이 들에 있는 형들에게 요셉을 보냈던 것은 물론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했음에도 혹시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당연히 형들로서는 정말 꼴도 보기 싫은 모습으로 요셉은 형들이 일하는 들에 나타났다. 결국 형들은 그를 잡아 비어있는 우물 속에 가두고 만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스마엘 장사치들에게 팔아버린다.
죽음 직전에서 구원받긴 하였지만, 은 20세켈에 팔려 감으로써 노예가 되어버린 요셉은 이후 엄청난 고초들을 겪는다. 그런데 그가 노예로 살아가게 된 무대는 팔레스타인 땅과 이집트 사이의 광야뿐 아니라, 나일강 하류에서 서쪽으로 연결되는 리비아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요셉은 운 좋게도 이집트 궁중에 들어가 말단 관원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파라오(바로) 왕의 꿈을 해몽한 일을 계기로 왕의 신임을 크게 얻는다. 그는 마침내 총리대신이 되어 이집트 주변의 흉년과 기근을 예지하고 대책을 미리부터 세워 해결하였으며, 풍수를 다스림으로써, 이집트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의 재난까지 해결한다. 요셉은 (기근에 시달리던)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맞아 태평성대를 누린다. 이후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이집트에서 천명을 다하고, 요셉은 아버지 장사를 지내게 된다.
이 소설은 구약성경 창세기 27장에서 50장까지의 짧은 이야기가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성경에 소개된 요셉의 이야기는, 괴테의 표현대로 하자면 '너무 짧다'. 괴테는 '작가라면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세세하게 그려내야 할 것만 같은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점에서 괴테가 이루지 못한 꿈을 토마스 만이 대신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 만은 구약성경 속의 '요셉'을 기독교 안은 물론이고 기독교 밖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읽힐 수 있도록 충만한 생명력으로 기록하고 있다.
토마스 만은 니체로 소급되는 낭만주의적인 신화 연구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했지만, 니체를 출발점으로 삼고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왜곡하는 자들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마스 만은 이들을 나치즘의 선구자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는 파시스트들의 신화란 이성을 마비시키는 비합리적인 도취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성인이 앞장서고 있는 파시즘으로부터 신화를 빼앗아, 신화가 휴머니즘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기능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소설은 구약성서는 물론 기타 다양한 신화들로 겹겹이 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마스 만이 깨닫고 싶어하던 인간 기원의 답이 바로 '신화'라는 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화들은 모두 기원신화를 안고 있다. 즉 천지창조, 신들의 전쟁, 인류의 기원, 홍수 이야기 등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록 다르지만 각각이 포함하는 요소는 거의가 비슷한 내용들을 갖고 있다. 그런데 토마스 만은 이들 신화들이 독자적으로 자생한(독창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화가 시대가 흐르면서 옷을 갈아입듯 조금씩 장소를 달리하며 (위치를 이동하며) 다른 형태를 띠었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토마스 만은 그리스 신화의 모태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이며, '예수 신화' 역시 구약성서 속 요셉 이야기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
토마스 만의 견해에 따르면, 구약성서 속의 요셉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티폰의 계보에 속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탐무즈와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아도니스와 디오니소스로 이어지는 유형의 신화다. 고대인들은 특히 신화 속의 인물과 자신들을 동일하게 여기곤 했는데, 요셉 또한 바빌론과 이집트의 세력권에서 살았던 그곳 신화에 등장하는 탐무즈나 오시리스를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고대인답게 그 신화 속의 영웅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다고 간주한다. 작품의 내용이 신화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뜻하는 것이었음에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성서 읽기’와 관련하여 몇몇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벨론 지역의 <길가메시>와 <탐무즈>, 이집트의 <이시리스>, 팔레스타인 땅의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은 공통으로 처녀 생산, 죽음의 문턱에서 부활, 텅 빈 무덤(우물) 등의 스토리들을 지니고 있다. 가장 진정한 인간의 이야기가 이렇듯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여는 내용이다. 여기서 독자는 신화들이야말로 그런 부활 경험의 결정체들이 아닌가 하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신화는 흔히 삶의 원형(아키타이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하나의 경건한 고정틀, 생명이 피와 살로 그 틀을 채워 넣을 때마다 되살아나는 것이 신화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신화의 반복으로 여긴 고대의 인물로 클레오파트라를 소개한다. 그 증거는 그녀의 죽음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가슴에 독사를 올려놓고 죽는데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이쉬타르, 이집트 신화의 이시스를 재현하는 삶이었다. 이쉬타르는 흔히 뱀옷을 입은 모습이거나 아예 목에 독사를 감고 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삶 또한 기존의 종교적 문화유산이 모두 투영된 것이므로, 그의 이야기 또한 구약성서(또는 신화)를 원형으로 한 위대한 삶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토마스 만은 요셉의 인생역정을 따라가면서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 전개 과정에는 고대 근동의 모든 신화가 녹아들어 있다. 서술이 의도하고 있는 내용은 사막에서 피어나는 인간 정신의 부활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의 서술에서 간파해 낼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신의 역사(役事)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신화뿐 아니라 바벨론과 이집트 지역의 신화에서도 같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믿음이다. 작가의 책이 집필되던 시대는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나치의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수많은 인간을 처참한 죽음으로 몰아갔던 양대 전쟁은 인간의 문명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되묻고 있었다. 이렇듯이 인간을 처절하게 좌절토록 만드는 시대의 한가운데서, 그는 부활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절실한 내용임을 생각해 내었다. 죽음을 넘어서는 (요셉의) 부활이야말로 인생의 참다운 줄거리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해당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비교해서 교차 서술했다.
'외국 현대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스타인벡 단편소설 『진주(The Pearl)』 (0) | 2024.05.17 |
---|---|
엘리슨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Invisible Man)』 (0) | 2024.05.14 |
모파상 단편소설 『귀향(歸鄕, Retour à la maison)』 (0) | 2024.05.03 |
헤르만 헤세 단편소설 『바그너와 클라인』 (0) | 2024.04.30 |
O. 헨리 단편소설 『마녀의 빵(Witches' Loaves)』 (4) | 2024.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