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송령 단편소설 『천녀유혼(聶小倩)』
우리나라에 홍콩 영화로 알려진 단편소설 『천녀유혼』은 중국 청나라 때의 작가 포송령1의 작품집 <요재지이(寥齋志異)>에 수록된 이야기다. 중국에서는 명대에 출간된 사대기서 <삼국지연의><수호전> <서유기> <금병매>에 다시 청대의 <요재지이><유림외사((儒林外史)> <홍루몽><금고기관(今古奇觀)>을 합쳐 팔대기서(八大奇書)라고 부른다. 문어체 괴이소설집 <요재지이>는 사본으로 읽혀 내려왔는데, 1766년 최초의 간본인 청가정본(靑柯亭本)이 간행되었다. 445편을 수록한 이 판본 계통의 16권 본이 여러 판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유포되었고, 지금은 500편 이상을 수록한 회교회주회평본(會校會注會評本)이 가장 좋은 판본으로 알려져 있다. 집필 기간은 오랜 세월이 걸렸고 서문을 직접 쓴 1679년 이후의 작품도 있다.
전편 모두 신선ㆍ여우ㆍ귀신(유령)ㆍ도깨비, 괴이한 사람이나 사건 등에 관한 이야기로 대부분이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에서 제재를 얻은 내용이다. 그중에서도 현세와 명계가 접촉한 이야기와 여우 이야기가 다른 내용보다 훨씬 많다. 또한, 요괴와 인간이 정을 나누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담이 많다. 암 여우와 여자 유령이 한 청년을 둘러싸고 경쟁하다가 마지막에 세 사람이 모두 이세에 걸친 인연을 맺는 이야기 <연향(蓮香)>,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현명한 암 여우 이야기 <영녕(嬰寧)>, 모란과 인동의 아름다운 꽃의 요정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 사나이 이야기 <향옥(香玉)> 등은 그 대표적 작품이다. 구어인 백화2(白話)가 아니라 전통적인 문어체인 고문으로 쓰였으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쓰기도 했던 헤르만 헤세도 만년에 이 책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천녀유혼』은 해당 책 제2권에 실려있다. 원한을 맺고 죽은 영혼과 현세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애절한 삶을 조명하면서, 사람의 진실한 사랑과 양심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구원을 받는 해원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삼는 작품이다. 문헌 등을 통해 전해지는 전통적인 동양의 귀신 세계를 매우 잘 표현했고, 현세와 내세가 서로 이어졌다는 세계 각지의 보편적인 믿음을 예술적으로 잘 그려냈는데 모두 합쳐 이백 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인의와 괴기가 재미있게 혼합되었고 스토리텔링 기법이 우수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중국의 명나라 말기로 영채신은 한 아내만 바라볼 정도로 성격이 굳세고 올곧은 사람이다. 어느 날, 영채신은 절간에서 우연히 연적하라는 검객을 만나 며칠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밤이 되자 섭소천이라는 열일곱 살의 처녀 귀신이 나타나 그를 유혹하였다. 하지만 영채신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튿날 영채신은 어떤 서생과 하인이 의문을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한밤중이 되자 섭소천은 다시 영채신을 찾아와 자신이 요물의 협박 때문에 인간들을 홀리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음 날 밤 야차3가 찾아와 그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백양나무 밑에 묻힌 자신의 뼈를 거둬 조용한 곳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다음 날 밤이 되니, 실제로 요물이 절간을 찾아왔다. 하지만 검객인 연적하가 가지고 있던 검에 의해 요물을 물리칠 수 있었다.
영채신은 섭소천의 소원대로 그녀의 뼈를 묻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섭소천이 돌아와 은혜를 입었다며 영채신의 첩이 되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영채신은 이를 받아들여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대를 이어야 하므로 귀신과 결혼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섭소천은 영채신을 오라버니로 모시겠다고 다시 간청하니, 어머니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섭소천은 영채신과 함께 살며 모자를 극진히 모셨다. 한편 영채신에게 아내가 있었는데, 아팠기 때문에 병상에 누워있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 그러자 평소에 섭소천을 달가워하지 않던 어머니는 마음을 바꿔 아들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몇 년 뒤, 영채신은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섭소천은 아들을 하나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요재지이>에 수록된 주요 이야기들은 당나라 때의 전기(傳奇)와 명나라 때의 <전등신화> 계통에 속하지만, 민간의 이야기 등을 그대로 채록하지 않고 특이한 이야기를 그려내겠다는 분명한 창작의욕을 가지고 집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기묘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오래된 구어를 효과적으로 구사한 독자적이고 간결한 표현으로 섬세하게 묘사하였고 순서도 정연하다.
거기에는 괴물 세계와 인간 세계의 교착이 아름답게 전개되고 에로티시즘의 매력도 더해져서 현실을 묘사한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 삶의 진실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요재지이>는 중국 괴이문학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중국에서 '설요재'라는 말은 괴이담을 이야기한다는 뜻인데 이 작품이 대표적이다.
청대 소설집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 <섭소천>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여러 차례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 한국 팬들에게 유명한 것은 장궈룽(張國榮)·왕쭈센(王祖賢) 주연의 1987년 작 『천녀유혼』이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서생이 폐사에서 아름다운 귀신을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원작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단순한 이야기를 인기 있는 대중영화로 만든 건 젊고 아름다웠던 장궈룽·왕쭈센의 매력과 당시로선 신기한 특수효과였던 걸로 기억한다.
♣
영채신은 섭소천의 뼈를 정성껏 장사하여 요괴로부터 구해낸다. 하지만 귀신과 결혼해서는 후사를 이룰 수 없다고 반대하는 영채신의 어머니와 병환을 앓고 있던 아내 때문에 둘은 결혼을 하지 못한다. 병든 아내를 두고 섭소천과의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은 첩 제도가 존재했던 당대에도 윤리 도덕에 반하는 것이었다. 결국, 영채신은 섭소천과 오누이처럼 지내며 효도의 도리와 장부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다가, 훗날 아내가 죽고 나서야 둘은 결혼을 하여 사랑의 결실을 이룬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겠지만 이야기는 당대인들의 사고체계를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 부모님에 대한 도리와 아내에 대한 윤리 앞에 섭소천과 사랑이라는 개인의 본능적 욕망은 철저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개인의 욕망은 윤리 도덕의 구현으로 성취되는 일종의 전리품과 같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략)<요재지이>는 당대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전통 위에 작가의 문학적 전통이 더하여 이루어낸 소설집으로 중국 문학에서는 이채를 띤다. 소개하는 『천녀유혼』은 해당 책 제2권에 실려있다. 모두 합쳐 이백 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가장 빼어났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으나 인의(仁義)와 괴기를 재미있게 얽어 처음과 끝이 가지런한 작품이다. 게다가 연전에는 턱없이 과장되고 윤색된 같은 제목의 홍콩영화가 인기를 끈 일도 있다. 무릇 소설을 할 사람이면 기회 닿는 대로 <요재지이> 전편을 한 번쯤 읽어보도록 권한다.(<이문열 세계명작산책> 4권 341쪽에서 인용)
- 청나라의 문인으로 일찍이 관직에 뜻을 품었으나 번번이 과거시험에 낙방한다. (72세에 이르러서야 향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자 대신 유명가문의 가정교사로 생활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저잣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이한 얘기를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심지어 자신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 사람에게는 음식을 대접할 정도였다. 이렇게 채집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말년에는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하였고, 요재지이와 성세인연 등의 명저들을 편찬하였다. [본문으로]
- 현재 중국에서 쓰는 구어체 언어. [본문으로]
- 『민속』 모질고 사나운 귀신의 하나.=두억시니 [본문으로]
- 전하여 오는 기이한 일을 세상에 전함. [본문으로]
- 『책명』 1378년경에 중국 명나라 구우가 지은 전기체(傳奇體) 형식의 단편 소설집. 당나라 전기 소설을 본떠 고금의 괴담과 기문을 엮은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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