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연작동화집 『모랫말 아이들』
황석영(1943~ )의 연작동화집으로 2001년 간행되었는데 작가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해주려는 마음으로" 써내려갔던 <어른을 위한 동화>다. 장황한 설명이나 감상을 배제한 간결한 서술과 사건 중심의 속도 있는 이야기 전개는 이 작가만이 가진 역량의 결과물이다. 이야기 속에 숨겨진 행간의 뒷이야기는 독자 스스로가 그 시절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 책 『모랫말 아이들』에 담긴 열 개의 이야기는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그러나 빼어난 유년기 성장소설로 읽힐 만큼 꽉 짜인 이야기의 힘과 서정의 울림이 강하다. 『모랫말 아이들』은 대가 황석영의 거침없는 필치와 탄탄한 서사구조, 고도로 절제된 서정 미학이 특징이다. 아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동화의 전범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서울 한강변의 모랫말이 배경이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은 그곳에서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소년 수남이가 화자가 되어, 모랫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 개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 꼼배 다리
먼 데서 혼자 흘러들어와 모랫말에 꼼배 다리를 만들어놓고 홀연히 사라진 땅그지 춘근이. 아이들은 그를 꼼배라 불렀다. 그의 오른쪽 팔목이 호미처럼 구부러졌기 때문이다. 거지 노릇을 하던 그가 피난민이던 함경도 여자 거지와 동거한다. 아이들이 들불놀이를 하다 다리 밑 움막에서 살던 꼼배의 처와 간난 아이가 불에 타죽는다.
"야 이 놈들아, 느이만 사람이냐, 느이만 사람이야?"
마을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그가 남긴 건, 원한이 아니라 근사한 돌다리, 꼼배 다리였다.
2. 금단추
엄마의 친구가 양공주로 떠나면서 맡기고 간 흰 얼굴과 파란 눈의 혼혈 여자 아이 귀남이. 귀남이의 엄마 영숙이는 신의주에서 교원으로 있다가 소련군에게 강간당하여 귀남이를 낳았다. 열흘 후에 돌아온다 하던 귀남이 엄마는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소문에 의하면 아예 일선의 어느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눌러 앉았다는 소문이었다. 수남이 엄마는 귀남이를 성당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마태오 신부님께 넘긴다. 귀남이가 마을의 신부님에게로 가게 되었을 때, 그녀가 수남이의 손에 쥐어준 낡은 금단추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따뜻했다.
3. 지붕 위의 전투
굵은 전깃줄이 지붕 위로 늘어진 것을 모르고 어떤 아이가 지붕에 얹힌 공을 꺼내러 올라갔다가 전깃줄에 붙어버린다. 발만 동동 구를 뿐 아무도 감전된 아이를 구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때 중부전선에서 파편을 맞고 바보가 된 인정 많은 상이군인 ‘고문관’이 자신도 감전되어 몸이 타들어가며 아이들을 구한다.
4. 도깨비 사냥
전쟁의 화염 속에서 수많은 시체를 불태운 화장터는 동네를 지나 들판 끝에 자리한 우중충한 건물이다. 그곳에서 도깨비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밤중에 그곳을 찾아가서 숨어서 도깨비를 찾지만 도깨비는 없었다. 시체를 태우는 평범한 아저씨가 있었을 뿐이었고 그는 누가 좌익인지 우익인지를 죄다 알고 있었다.
5. 친이 할머니
낯선 이국땅에서 늙은 고양이를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래는 화교 친이 할머니. 화교가 운영하는 붉은 벽돌의 쌍성여관은 원래 쌍성루라는 큰 중국 요릿집이었다. 그 집에서 쥐를 잡던 아이들에게 뚱보 아이 친의 할머니가 살아있는 쥐 한 마리를 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얻은 살아있는 쥐를 주지만 늙은 고양이에게 주지만 고양이 쥐를 먹지 못하고 갖고 놀기만 한다. 이듬해 할머니는 노환으로 죽는다.
6. 삼봉이 아저씨
상둣도가는 장의업체이다. 그곳에서 홀아비 삼봉이 아저씨는 머슴일을 한다. 주인인 유 노인은 칠순임에도 스물두 살짜리 시골 작부를 데려와 살고 있다. 노인은 여인을 포구에서 쌀 열 섬에 데려왔는데 어릴 적부터 작부 짓을 해왔다는 것이다. 여인의 배가 불러오자 삼봉이 아저씨는 부처님께 몹쓸 죄를 지었다며 마을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7. 내 애인
영화네는 댄스홀을 하고 있었고 가끔 그 집에서는 검둥이들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칼부림을 하며 술주정을 벌였다. 영화는 수남이를 집에 데려와 초콜릿을 먹게 했고 요요라는 장난감도 주었다. 기지촌에서 양공주들과 함께 생활하는 영화는 수남이의 어깨를 잡더니 볼에 입을 맞추었고 지금껏 마음속 애인으로 남아있다.
8. 낯선 사내
중학생처럼 박박 깍은 머리가 채 자라지 못해서 밤송이 같았고, 얼굴의 왼쪽 볼부터 입술 언저리까지 살갗이 쭈글쭈글 일그러진 남자는 문둥이처럼 보였다. 전쟁 중 화염방사기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북한이 고향인 그는 석방포로였다. 얼굴이 일그러진 채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돌아온 슬픈 사내는 모랫말 마을로 피난 온 처녀가 결혼한 것을 알고는 조용히 돌아간다.
9. 남매
동네에 곡마단이 들어온다. 동네 아이들은 포스터를 붙이며 입장권을 얻게 되지만 늘 배고파하며 떠돌아다니는 곡마단의 어린 남매를 알게 된다. 고아인 남매 중 누나가 곡예하다 떨어진 후 다리에 깁스를 대고 남자 어른의 등에 업혀 있었다. 누나와 헤어질 염려가 없게 된 동생이 그 옆에서 웃고 있었다.
10. 잡초
어머니는 방직공장 사무원으로 취직하고 아버지는 사업한답시고 남쪽으로 가는 바람에 다 큰 처녀인 먼 친척 태금이 누나는 엄마의 요청으로 수남이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다 태금이는 몹시 가난한 집안의 청년과 눈이 맞아서 가출한다. 이후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태금이는 빨간 완장을 차고 수남이 가족 앞에 나타났고 부모님은 그녀에게 깍듯이 대했다. 다시 인민군이 철수하자 태금이를 닮은 거지꼴을 한 미친 여자 한 명이 모랫말로 다시 돌아와 동네를 헤매고 돌아다녔다.
열 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혹독한 현대사의 아픈 풍경이기도 하지만 무한한 삶의 비밀을 품고 있는 모든 유년에 대한 아름다운 송가이기도 하다. 암울한 시절에도 사람들은 존재했고,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속에 한줌의 따뜻함은 엿보인다. 오늘을 사는 우리를 진정한 우리이게 하고, 내일을 향해 희망을 꿈꾸게 하는 힘은 바로 그 그늘진 세월을 꾹꾹 밟고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른을 위한 동화이기도 한 이 이야기 속에 건강한 의식의 인간 원형이 창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월과 함께 살아온 우리 시대의 모든 유년이 『모랫말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 아프지만 아름답게 복원되어 있다.
“우리 식구들은 시월 중순께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시골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에 나는 꽤 무감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어른들 뒤를 따라 타박타박 걸으면서 먼지 나는 신작로 위에서 내가 본 것은 하얗게 내리쬐는 땡볕과 죽은 개처럼 부패하고 있는 사람의 시체들이었다. 간장을 끓이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고 혼자서 아무데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나는 우리 동네 밭고랑에나 수챗구멍에서 보았던 쥐새끼의 시체를 대하던 버릇대로 침을 한 번 뱉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p.143-144)
♣
우리 시대 모든 어른들의 비밀스런 유년이 『모랫말 아이들』의 이야기보따리 속에 담겨 있다고 단언하는 도정일1 교수의 헌사를 읽어보자.
"우리를 키운 비밀의 거의 전부는 우리가 아이들이었던 때의 바람과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우리를 가슴 설레게 했던 모든 것들, 우리의 놀라움과 기쁨, 사랑의 경이, 그리고 무언가를 알게 된 순간의 슬픔과 은밀한 눈빛…… 이 비밀스런 것들이 아이를 키우고 어른을 지탱하고 사람을 사람이게 한다. 황석영의 『모랫말 아이들』은 그런 비밀 보따리의 하나이다. 거기서 우리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난다."
-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문화운동가. 인간, 사회, 역사, 문명에 대한 인문학의 책임을 강조하고 인문학적 가치의 사회적 실천에 주력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자. 2006년 대학에서 퇴임했으나 2010년 다시 대학으로 복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으로 학부 교양교육을 쇄신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2001년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일으켜 어린이 전문도서관 ‘기적의 도서관’을 전국 11개 도시에 건립했고 2006년 이후 80개 농산어촌 초등학교에 도서관을 설치했으며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운동, 교사를 위한 독서교육연수 프로그램도 주도해오고 있다. 저서로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공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공저) 『불량사회와 그 적들』(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순교자』 『동물농장』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 비평상, 일맥문화대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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