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장편소설 『태평천하』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의 장편소설로 1938년 <천하태평춘>이라는 제목으로 [조광]지에 1월부터 9월까지 연재되었다. 풍자적 수법을 사용한 장편소설이다. 전체 15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장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1940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태평천하』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 하의 지주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윤직원 영감의 역사의식 부재와 그 집안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판소리 사설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문체가 재미를 더해 주고 있는 채만식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서울이고, 때는 ‘정축년(1937년) 구월 열 날’이다(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이 1937년 7월이니까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중일전쟁이 시작된 직후가 되는 셈이다). 대개의 장편소설에서 사건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전개되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단 이틀 동안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꾼이나 하인은 상전을 섬기기만 하고 대가는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윤직원 영감은 인력거를 타고 와서는 그 삯을 깎겠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나이 어린 기생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아무 것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윤직원 영감은 자기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소작인에게 땅을 부쳐 먹고 살게 하는 것도 무슨 큰 자선 사업이나 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 식으로 부를 축적한 윤직원 영감에게는 쓰라린 기억이 있다. 출처가 불확실한 돈을 모았던 그의 아버지가 구한말 시절에 화적들의 습격을 받아서 죽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일본인이 들어와 불한당을 막아 주고 '천하태평'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윤 직원은 진심으로 일본인들을 고맙게 생각한다. 돈을 버는 데는 무엇보다도 권력과의 결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윤 직원 영감은 경찰서 무도장을 짓는 데 아낌없이 기부한다.
또, 윤직원은 양반을 사고, 족보에 도금한 것으로도 모자라 손자 '종수'와 '종학'이 군수와 경찰서장이 되어 가문을 빛낼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과 손자는 윤직원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집안의 분란은 끊이지 않는다. 아들 '창식'은 집을 돌보지 않고 노름으로 밤을 새며 가산만 탕진하고 있고, 군수를 시키려던 손자 '종수'는 아버지의 첩 '옥화'와 정을 통하는 불륜을 저지른다. 며느리나 손자며느리도 고분고분하지가 않고 딸마저 시댁에서 소박맞고 와서 함께 살고 있다.
윤직원은 동경에서 종학이가 사회주의에 참여하다가 경시청에 붙잡혔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어제 윤 주사가 받은 전보가 바로 그 전보이다,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이 아찔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자기가 믿고 사랑하고 있는 종학의 신상을 여겨서가 아니다. 윤직원 영감은 종학아가 사회주의를 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이 진실로 옛날의 드세던 부랑당패가 침노하는 것보다 더 분하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는 순사가 거리를 지켜주고, 재산을 지켜주는 이 태평천하에 부자 놈의 자식이 어째서 부랑당패에 참여를 했냐고 하면서 종학이를 죽일 놈이라 욕하며 흐느낀다.
예전의 별명이 윤 두꺼비였던 윤두섭(직원이라는 것은 시골 향교의 직함이다)은 시골에 천 명이나 되는 소작인을 거느리고 서울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72세의 홀아비이다. 그에게는 창식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고, 그 밑에 종수와 종학이라는 손자가 있으며, 종수 아들인 경식이라는 증손자가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윤직원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곤 증손자 경식밖에 없다. 아들 창식이는 아내 고씨를 놓아두고 밖에서 첩살림을 하고 있으며, 종수는 시골의 군 서기로 있고, 종학은 일본에 유학 중이다. 그래서 윤직원댁에는 과부 아닌 과부가 셋이나 되고, 게다가 딸인 서울아씨는 진짜 과부이다. 그 외에 윤직원이 늘그막에 어떤 여인에게서 얻은 열다섯 살짜리 백치 아들인 태식과 윤직원의 비서라고 할 대복이가 있다. 바로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이 소설의 줄거리가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윤직원 자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부자이면서도 돈 한 푼도 아까워 온갖 노랑이짓을 다 한다. 버스 요금이 아까워 잔돈이 없다며 지전을 내어 무임승차하기, 명창대회에 가서는 이등석 표를 사서 억지로 일등석에 앉기, ‘삯을 알아서 주십시오’하는 인력거꾼에게 ‘그럼 그냥 가소’ 하며 억지 쓰기 등 그의 행동거지는 가히 천하일품이다. 옛날 놀부 심보와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돈쓰기를 마다하지 않는 곳도 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온갖 보약을 먹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오줌을 싸다가 아침마다 먹는다든가, 지위를 높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족보를 위조하고, 시골 향교의 직원 직함을 사며, 가난한 양반과 사돈을 맺는다. 나아가서는 두 명의 손자를 각각 군수와 경찰서장 자리에 앉히기 위해 몇 만원 돈의 소용도 감내한다.
그렇다고 윤직원의 인생이 그리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말대가리 윤용규로부터 가세가 피기 시작한 그의 집안은 화적떼들과 욕심 사나운 수령들 때문에 많은 환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요즈음 윤직원은 예전처럼 그렇게 화적이나 수령을 겁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일본이 지켜 주니까. 우리 민족을 식민지로 삼고 온갖 수탈을 해 대던 일제가 윤직원에게는 원망의 대상은커녕 오히려 은인인 셈이다.
♣
윤직원의 아들 창식과 손자 종수는 부패하고 타락한 인물들이다. 오직 일본에 유학 가 있는 종학만이 성실하게 윤직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공부를 잘한다. 윤직원은 종학이 반드시 경찰서장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태평천하』는 그 종학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는 전보가 날아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것은 윤직원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윤직원에게 일제 식민지 체제는 태평천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나 믿었던 손자 종학은 그런 태평천하를 부정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사회적ㆍ풍속적 상황을 적절히 반영하면서 1930년대 일제하의 사회 현실의 격심한 퇴폐상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풍자나 해학이 통하는 사회였던 만큼 그의 작품은 당대 사회의 미묘한 모순과 인간성에 대한 비판을 소설적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미학적 범위는 현대사회로 전환되는 시기에 있어 일어나는 모순과 세태의 반영에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윤직원이라는 부정적 인간을 전형적 인물로 설정하여 이를 통한 회화적 수법을 보인 점에서 근대소설의 또 다른 반어적 세계를 형상화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묘사들을 통해 일제하 자본주의의 모습과 신구 갈등, 친일 지주의 탄생 등을 조감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태평천하』는 혼탁한 현실 속 모순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고발한다. 이 작품은 부정적인 상황들이 난무하는 시대 현실을 독자적인 문학적 기법과 비판의식으로 그려냄으로써 ‘문학적 미’를 추구한다. 판소리 사설의 반어, 자기 폭로, 비유, 과장, 희화화 등의 표현법에 사투리까지 섞은 요설로, 창을 듣는 듯한 느낌과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으로 세태풍자소설의 장을 열었던 채만식이 쓴 가족사 소설의 전형이다.
- 식민지 시대와 해방기를 거친 진보적 지식인 소설가 채만식(1902. 6. 17~1950. 6. 11)은 전북 임피에서 태어나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제일와세다고등학원 문과에서 수학하였다. 1924년 12월 단편소설 「세 길로」를 발표(이광수 추천)하여 등단한 이후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소설 창작활동을 펼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2주 전 폐결핵으로 영면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전(傳) 소설인 『심청전』과 『춘향전』 등의 영향 아래 『탁류』, 『태평천하』와 같은 장편소설을 통해 새로운 풍자의 미학을 선보였으며,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소망」, 「생명」과 같은 빼어난 단편소설을 남긴 작가다. 또한 일제 말기 자신의 대일 협력문제를 성찰한 「민족의 죄인」과 「낙조」를 발표함으로써 민족과 개인과 사회의 문제에 관한 천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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