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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석탈해왕과 국제결혼

by 언덕에서 2022. 10. 5.

 

석탈해왕과 국제결혼

 

 

국내 거주 외국인이 200만 명을 넘어 250만 명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주노동자와 유학생은 물론 국제결혼이 다양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의 5%에 달하는 숫자로 우리나라는 이미 다문화국가에 들어선 듯하다. 그렇다면 단군의 자손인 우리는 단일민족일까? 그리고 21세기 글로벌 지구촌에서 단일민족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우리 역사를 찾아보면 단일민족의 전설이 완전히 허구임을 밝히는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신라왕 석탈해가 아닐까 한다.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재위 57~80년)는 토착 한민족이 아니고 이방인 출신이었다. 그의 출생신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편, <삼국유사> '탈해왕' 편, < 가락국기 > 에 소개돼 있다.

 석탈해는 자기 나라에서 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난생(卵生) 즉 알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상자에 실린 채 한반도 동남부에 표착했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난생은 혼외정사로 인한 출생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주몽, 박혁거세, 김알지 설화 등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경우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알이 버림을 받아 국가를 세우는 경우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인생역전', '위기극복', '위인의 신격화' 등의 의미가 있어보인다.

 한반도에 흘러들어온 석탈해가 해안가에 표착했을 때에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왔기에,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어낸 석(昔)자를 성씨로 삼게 됐다고 < 삼국사기 > 와 < 삼국유사 > 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기록상으로 보이는 월성(경주) 석씨의 기원이다.

 신화에서는 석탈해가 상자에 실린 채로 한반도 해안에 표착했다고 했지만, 김해 해안에서 수로왕의 세력과 싸운 점으로 볼 때 실제로 그는 상당한 규모의 군사세력을 갖고 한반도에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출신국 명칭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가락국기 > 에서는 완하국(琓夏國)이라 했고, < 삼국사기 > 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 했으며, < 삼국유사 > 에서는 용성국(龍城國)이라고 적고 있다.

 

 

▲ MBC 드라마 < 김수로 > 에 등장한 석탈해(이필모 분).

 

 

 

 사료마다 명칭이 다 다르지만, 이 명칭들은 실상은 동일한 나라를 가리킨다. < 삼국유사 > 에서는, 용성국은 정명국·완하국·화하국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이런 점을 보면, 석탈해의 출신국이 주변 세계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0세기 이전의 중국인들이 조선왕조를 조선·한국·고려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럼, 완하국·다파나국·용성국·정명국·화하국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진 석탈해의 출신국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이에 관해 < 삼국사기 > 에서는 "그 나라는 왜국 동북쪽으로 1천 리에 있었다"고 했다.

 지도상으로 볼 때, '왜국 동북쪽 1천리'에 해당하는 곳은 캄차카반도(현재 러시아땅)뿐이다. 물론 일본열도와 캄차카반도 사이의 거리가 문자 그대로 1천 리는 아니다. 고대인들은 막연히 먼 곳을 가리킬 때에 백이나, 천이니 만이니 하는 숫자들을 그저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1천 리 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대로 해석하면 그 위치가 캄차카 반도로 비정되어 석탈해는 근동 러시아 지방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경주에 정착한 동북아시아 몽골계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경주에 있는 탈해왕의 묘. 탈해왕은 전임 왕인 남해왕의 장녀 아효부인과 국제결혼을 했다>


 

 그러나 석탈해가 캄차카 출신이라는 학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1. 국문학자 최래옥 선생은 우리나라 건국 초기의 왜란 지금의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먼먼 바다 저쪽 어느 나라라는 지점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쪽 중국이나 인도라는 뚜렷한 제시가 없는 왜란 우리나라의 남. 동. 북 세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때에 서해안을 타고 배로 남하한 연안 남하족(沿岸南下族)이 있었다고 보면, 이 탈해 세력은 신라보다 먼저 가락국 같은 남쪽 나라에 접근하였다고 보는 견해다. 실제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석탈해가 가락국에 상륙하여 기존 세력인 김수로왕을 몰아내려고 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석탈해의 고국은 신라로 보면 남쪽 바다 쪽, 곧 가락국에 먼저 도착할 만한 방향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제주도인가? 유구, 대마도, 일본, 태평양의 어느 섬, 아니면 연안 따라 온 같은 북방 남하족인데, 바다에서 상륙 진출하였으니 신비감을 주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용성국이라고 했다는 의견이다. (최래옥 저. 하늘님, 나라를 처음 세우시고 : 181 ~ 182p)

 

2. 다파나국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다만 왕비가 사생아를 낳아 그 아이를 바다에 띄워 운명을 시험하는 설화가 인도를 비롯한 남지나해 부근의 여러 나라에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서아시아나 동남아의 해상세력으로 추측했다.(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 실록 : 333p)

 

3. 석탈해가 일본의 오키제도 출신이라는 학설은 이렇다. <삼국사기>는 탈해가 다파라국의 왕자라고 했으나, <삼국유사>는 용성국, 정명국, 완화국, 화하국으로도 불렀으며, 당시 사람들이 왜를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한 것임을 감안할 때 울릉도 동남쪽에 위치한 오키제도의 한 섬 출신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국왕 함달파와 적녀국 출신의 왕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두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 중에 탈해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진 것으로 치부해도 무방하겠지만, 탈해가 왜국에서 일천여 리에 위치한 용성국 출신이라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 실록 52p)

 

 

▲유라시아대륙. 붉은 별표 부분은 본문에서 언급된 캄차카 반도. ⓒ 구글 위성지도

 

 

 석탈해가 캄차카 반도 출신이냐, 일본 출신이냐, 동남아 출신이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은 어려서부터 순수한 단일민족이고 모두 단군 자손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는다. 중, 고교 교과서에는 지금도 여전히 “단군이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해서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쓰여 있다.

 신화를 진짜 역사처럼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단일민족이란 그릇된 인식을 어려서부터 심어줘 외국인을 배타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한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소재 '석탈해왕 탄강 유허', 1845년에 석씨 문중에서 조정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곳이다.

 

 한민족은 적어도 두 개 이상, 서너 개의 다른 인종이 융화돼 형성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금은 더 우세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귀화를 했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 중 외국인이 귀화하면서 새로 만든 귀화인 성(姓)은 442개로, 286개인 토착성의 1.5배에 달한다. 공식적으로 집계가 되는 귀화 성씨만 하더라도 중국계를 위시해 여진, 위구르, 몽고, 일본, 베트남, 아랍계 등 의외로 다양하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꼽히는 장영실만 하더라도 고려 때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의 후손이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일대와 알타이 산맥 근처에 사는 시베리아 원주민은 우리와 구별이 어려울 만큼 얼굴이 비슷하다는 것은 인류학자 대부분의 지적이다. 그것은 한민족의 주류가 북방계인 점은 의미하는데 이곳의 부리야트족, 알타이족은 한국인처럼 북방계 몽골리안으로 다리가 짧고, 두터운 지방층을 갖고 있다. 또 얼굴이 평평하며, 코가 낮고, 입술이 작고, 눈꺼풀이 두텁고, 눈이 가늘다. 이런 생김새는 열 손실이 적고 눈을 보호하기 때문으로 추위에 강한 체질이다.

 시베리아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이 모두 우리의 단군설화나 금와왕 이야기와 같은 민족 건국설화를 저마다 갖고 있는데 이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터키에서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을 거쳐 몽골과 만주, 한반도로 이어지는 알타이 문화권에서 말로 전해오는 구비문학이 우리의 전래동화나 민담과 모티브가 매우 유사한 점 또한 놀랍다.

 

 

<김수로왕 왕비, 김해 허씨의 시조 '허황옥' 영정 : 허왕옥은 인도 '아유타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북방에서 온 북방계 몽골리안의 혈통만 이어받은 것은 아니다. 폴리네시아나 인도 등 남방계 아시아인의 유전자도 일부 섞여 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가야국의 공동 주주인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나 신라의 왕 <석탈해> 역시 이러한 해양세력 혈통의 흔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한민족에게 남방계의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 DNA와 Y염색체를 분석한 서울대 홍성수 박사와 단국대 김욱 교수는 그 비율이 대략 15∼20%라고 생각한다. 홍 박사는 일본 학자들과 함께 서울과 제주에 사는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는데 이 가운데14.5%는 폴리네시아 등 남태평양 토착민에게 나타나는 유전 형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보면 한국인은 대체로 ‘북방계’ 몽고인종의 유전자를 이어받았지만, 남태평양 집단의 유전자도 15% 가량 이어받아 결코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수만 년 동안 섬에 고립된 채 갇혀 살지 않는 이상 단일민족은 만들어질 수 없다. 단일민족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인간도 그렇거니와 생물은 한 지역에 오래 고립돼 외부의 유전자가 유입되지 않으면 급격한 환경 변화가 왔을 때 적응하지 못한 채 멸종하는 경우가 있다. 더욱이 인간은 먼 곳에서 인구가 유입되면서 다양한 기술과 문화 그리고 언어를 흡수하게 된다. 한민족이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고립된 채 살았다면 아마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이 오늘날 외국에서 유입되는 국제결혼 이민자들을 새로이 봐야 하는 시각이 아닐까 한다.